요번엔오래도록 잘 살아보자고유기동물 보호센터에서 데려온 삽살개 이름을 살구라고 지었는데어머니는 한사코 개라고 부른다.자식이 몇이에요? 사람들이 물으면산 것만 다섯이오! 갑자기 역정을 낸다.넉 달 남짓과 여섯 달 아흐레 만에 어미 뱃속을 떠난 작은 사금파리를산 놈들 사이사이에 끼워 넣는다.이름은커녕배냇저고리도 받지 못한 새끼들도 있는데뭔 지극정성으로 개 이름까지 모시겠어?이름 지어 부르면 이별할 때 힘들어, 나도 마음 보깨지 않으려고 이러는 거야.개가 개지, 닭이나 염소한테 이름 붙이남?그냥 누렁이, 흰둥이, 바둑이처럼 색깔만 입혀
푸세식 우리 집 옛날 변소며칠 동안 비온 날조심조심 똥 눈다똥 떨어지면퍼뜩 엉덩이를 든다풍빨리 들었는데도엉덩이에 똥물이 튄다풍풍척그때마다엉덩이를 들었다 놨다누가 보면니 엉덩이춤 추나 하며 웃을 거야생각만 해도 웃음 나온다똥 누며 혼자 웃는다[감상] ‘나도 저런 적이 있는데’ 하며 웃는다. 우리 아이들은 상상만 해도 비명을 지르며 기겁을 하겠지. 어릴 때 여동생이 변소에 빠져 수돗가에서 씻겨 준 적도 있다. 늦은 밤, 막내도 변소에 빠져서 큰일 날뻔했다. 변소는 튀기기도 하지만 빠지기도 했던 무시무시한(?) 곳이었다. 160명이 한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감상] 시인은 진정한 ‘고백’을 꿈꾼다. ‘자기비판
아이의 장난감을 꾸리면서아내가 운다반지하 네 평 방을 모두 치우고문턱에 새겨진 아이의 키눈금을 만질 때 풀썩습기 찬 천장 벽지가 떨어졌다아직 떼지 않은 아이의 그림 속에우주복을 입은 아내와 나잠잘 때는 무중력이 되었으면아버님은 아랫목에서 주무시고이쪽 벽에서 당신과 나 그리고천장은 동생들 차지지난번처럼 연탄가스가 새면아랫목은 안 되잖아, 아, 아버지생활의 빈 서랍들을 싣고 짐차는어두워지는 한강을 건넌다 (닻을 올리기엔주인집 아들의 제대가 너무 빠르다) 갑자기중력을 벗어난 새떼처럼 눈이 날린다아내가 울음을 그치고 아이가 웃음을 그치면중
사람 냄새 맡으러 흥해장 간다큰 장은 2일 7일, 샛장은 4일 9일큰 장까지 너무 멀어 샛장 만들었나회전교차로 중심부 들어낸 네거리넉넉한 귀퉁이마다 펼쳐진 난전시끌벅적 소리에 온갖 맛 뒤섞인다트럭 위, 유연한 허리 돌리고 팔 휘저으며격렬하게 흔들던 모자 쓴 머리 잠시 멈춰꼴단 같은 대파 한 단 건네준다유난히 크고 두터운 손두부 도토리묵노랗게 절여 무친 콩이파리흰쌀밥에 척척 걸치면바이러스에 시달린 입맛 돌아오겠지오오돌김 칠포멸치 남송배 북송미나리짭조름 달콤한 내음 온 장에 퍼진다내장 빼고 꼬챙이 괸 반건조 대구갖은양념으로 조려 먹고
몸을 쓴 만큼 섬겨야 할 나이머리 쓴 만큼 비워야 할 나이뱉은 말 만큼 들어야 할 나이느낀 만큼 나누어야 할 나이고요한 숲으로 돌아와마음도 원망도 욕심까지도하나둘 그냥 내려놓고받은 만큼 베풀어야 할 나이나를 찾아 나를 위로할 나이[감상] 장석주 시인은 ‘내 스무살 때’라는 시에서 ‘스무 살’을 “산책의 기쁨도 알지 못했고/ 밤하늘의 별을 헤아릴 줄도 몰랐고/ 사랑하는 이에게 사랑한다는 따뜻한 말을 건넬 줄도 몰랐지”라고 노래했다. 최승자 시인은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라고 썼다. ‘마흔’
낮에는하늘 반, 산 반밤에는별 반, 고요 반별빛마을 사람들 모두는마당이 두 개하늘 큰 마당집 작은 마당[감상] 이광수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산골 집값』(도서출판 움, 2021)에서 고른 시다. 이광수 시인은 영천 보현산 자락 별빛마을에서 자연을 벗 삼아 살아가는 자연을 닮은 시인이다. 최근에 세 번째 시집 『꽃이 나 좋으라고 피었겠나』(놀북, 2023)도 출간했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무장무애(無障無?)의 시편들이 옹달샘처럼 맑고 시원하다. 영천 보현산 자락 “별빛마을 사람들 모두는/ 마당이 두 개”란다. 부럽다. “하늘 큰
야근의 새벽쇳가루 펑펑 뛰는 작업장에서페인트 칠을 한다보다 쾌적한 작업환경을 위해낼 모레 높으신 분의환경검열에 죽어나지 않기 위해달리 무슨 이유도 없이엄습하는 졸음과 소음한치도 쉼 없는 작업에밤 내내 만신창이 된 꺾어진 몸뚱이로떠지지 않는 눈은 차라리 감고비틀비틀칠하고또 칠하고내 젊음이 꿈꿀 수 없는 새벽을짓뭉개듯 칠하고잠깐 졸음에 흥건히 쏟은흰색 페인트의 절규를 긁어모으며눈물 같은 웃음도웃음 같은 눈물도뿌릴 수 없는 새벽또어느 작업장에선이 땅의 푸석한 노동의 얼굴들이밟히고 또 밟히면서도머지않은 아침을 기다리는 피맺힌 호흡뿌리며일어
겨울이면 시금치 엮는 손끝이 저글링보다 빨라요, 손끝마다 잇몸을 드러내고웃는 시금치, 차례를 알아 제 처지를 알아 순서대로 눕네요, 시름시름한 시금치는 그날그날 저녁 국이 되었지요, 시금치는 모래에서 잘 자랐습니다. 바닷바람 맞으며 시금치가 자라는 곳은 송도 솔밭이었어요, 봄가을 뛰어놀던 모래 솔밭은 겨울이면 황금꽃을 피웠지요, 나는 소풍을 가고 엄마는 일터에 갑니다.시금치를 팔아 시금치 넣은 김밥을 싸 주었지요, 시금치는 달콤한 겨울이었습니다. 엄마는 시금치를 엮어요, 저글링보다 더 빨라요, 시금치는 식탁을 차려요, 삼 남매의 고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그믐처럼 몇은 졸고몇은 감기에 쿨럭이고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침묵해야 한다는 것을모두들 알고 있었다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그래 지금은
당신과 헤어지고 보낸지난 몇 개월은어디다 마음 둘 데 없이몹시 괴로운 시간이었습니다현실에서 가능할 수 있는 것들을현실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우리 두 마음이답답했습니다하지만 지금은당신의 입장으로 돌아가생각해보고 있습니다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잊을 것은 잊어야겠지요그래도 마음속의 아픔은어찌하지 못합니다계절이 옮겨가고 있듯이제 마음도 어디론가 옮겨가기를바라고 있습니다추운 겨울의 끝에서 희망의 파란 봄이우리 몰래 우리 세상에 오듯이우리들의 보리들이 새파래지고어디선가 또새 풀이 돋겠지요이제 생각해보면당신도 이 세상 하고많은 사람들 중의한 사람이
올해도은행잎이 노랗게 물들었어요.작년에 그랬고요제 작년에 그랬답니다.할머니께 여쭤봤더니옛날에도 그랬대요.해마다 가을이 되면은행잎은 노랗게 물이 듭니다.언제 누구랑 한 약속인지잘 모르겠지만해마다 가을이 되면은행잎은 노오란 약속을 지킵니다.그래서 사람들이은행, 나무라고 그러나 봐요.[감상] 대학교 4학년 땐가 아동문학의 이해라는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그때 처음 동시(童詩)를 배웠다. 자작 동시 두 편이 과제였는데, ‘학교 가는 길’과 ‘노오란 약속’을 써서 냈다. 쌍권총으로 완전무장(?) 했던 내 학점에 구원의 ‘A+’가 날아들었다
내 소리도 가끔은 쓸 만하지만그보다 더 좋은 건피는 꽃이든 죽는 사람이든살아 시퍼런 소리를 듣는 거야무슨 길들은 소리 듣는 거보다는냅다 한 번 뛰어보는 게 나을 걸뛰다가 넘어져보고넘어져서 피가 나보는 게 훨씬 낫지가령 이란 말, 언뜻앞이 탁 트이는 거 같지만 그보다는나무 위엘 올라가보란 말야, 올라가서세상을 바라보란 말이지내 머뭇거리는 소리보다는어디 냇물에 가서 산 고기 한 마리를무엇보다도 살아 있는 걸확실히 손에 쥐어보란 말야그나마 싱싱한 혼란이 나으니야음을 틈타 참외 서리를 하든지자는 새를 잡아서 손에 쥐어팔닥이는 심장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조용히 울고 있었다.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까맣게 몰랐다.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그는 몰랐다.[감상] 언젠가 순천만 노을을 보러 갔다가 조류 인플루엔자로 아쉽게 발길을 돌린 적이 있다. 처연한 풍경을 보러 순천만에 가야지, 가야지, 했는데 이토록 덧없이 시간만 흘렀다. 국내에서 가장 넓은 갈대밭이 순천만에 있다. 대략 15만 평이나 된다. 갈대와 억새를 구별하지
한 사람이 나를 향해 돌진하였네 내 너머의 빛을 향해나는 조용히 나동그라지고한 사람이 내 쪽으로 비질을 하였네 아무렇게나 구겨진 과자봉지처럼내 모두가 쓸려갈 것 같았네그러나 어디로도 나는 가지 못했네골목에는 금세 굳고 짙은 어스름이 내려앉아리코더를 부는 한 사람이 있었네가파른 계단에 앉아 그 소리를 오래 들었네뜻 없는 선율이 푸수수 귓가에 공연한 파문을 일으킬 때슬픔이 왔네실수라는 듯 얼굴을 붉히며가만히 곁을 파고들었네 새하얀 무릎에 고개를 묻고 잠시 울기도 하였네슬픔은 되돌아가지 않았네얼마 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나는, 그 시무룩
하늘보다 먼저 숲이 저문다숲이 먼저 저물어어두워오는 하늘을 더 오래 밝게 한다숲속에 있으면 저녁은시장한 잎벌레처럼 천창에 숭숭구멍을 뚫어놓는다밀생한 잎과 잎 사이에서모눈종이처럼 빛나는 틈들,하늘과 숲이 만나 뜨는저 수만의 눈을 마주하기 위하여더 깊은 숲속으로 들어간다저무는 하늘보다 더 깊이 저물어서공작의 눈처럼 펼쳐지는 밤하늘내가 어디서 이런 주목을 받았던가저 숲에 누군가 있다내 일거수일투족에 반응하는 청설모나 물사슴,아니 그 누구도 아니라면 어떠리허공으로 사라진 산딸나무꽃빛 같은 것이면 어떠리저물고 저물어 모든 눈들을 마주하는저녁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저 안에 태풍 몇 개저 안에 천둥 몇 개저 안에 벼락 몇 개저 안에 번개 몇 개가 들어 있어서붉게 익히는 것일 게다.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저 안에 땡볕 두어 달저 안에 초승달 몇 날이 들어서서둥글게 만드는 것일 게다.대추야너는 세상과 통하였구나[감상] 생각지도 못하게 우리 반 아이들이 다음 주에 있을 연구학교 보고회 식전 공연을 맡게 되었다. 시 암송과 자작시 낭송이 공연이 될까. 내심 합창부나 가야금 동아리가 나서주길 바랐으나, 아이들의 시 낭송이 더 참신(?
투명해지려면 노랗게 타올라야 한다은행나무들이 일렬로 늘어서서은행잎을 떨어뜨린다중력이 툭, 툭, 은행잎들을 따간다노오랗게 물든 채 멈춘 바람이가볍고 느린 추락에게 길을 내준다아직도 푸른 것들은 그 속이 시린 시월내 몸 안에서 무성했던 상처도 저렇게노랗게 말랐으리, 뿌리의 반대켠으로타올라, 타오름의 정점에서중력에 졌으리라, 서슴없이 가벼워졌으나결코 가볍지 않은 시월노란 은행잎들이 색과 빛을 벗어던진다자욱하다, 보이지 않는 중력[감상] 시월의 마지막 날이다. 영일대 바닷가에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 울려 퍼진다. 작년 시월 마지막 날도
바람이 커튼을 밀어서 커튼이 집 안쪽을 차지할 때나많은 비를 맞은 버드나무가 늘어져길 한가운데로 쏠리듯 들어와 있을 때사람이 있다고 느끼면서 잠시 놀라는 건거기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낯선 곳에서 잠을 자다가갑자기 들리는 흐르는 물소리등짝을 훑고 지나가는 지진의 진동밤길에서 마주치는 눈이 멀 것 같은 빛은 또 어떤가마치 그 빛이 사람한테서 뿜어나오는 광채 같다면때마침 사람이 왔기 때문이다잠시 자리를 비운 탁자 위에 이파리 하나가 떨어져 있거나멀쩡한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져서 하늘을 올려다볼 때도누가 왔나 느끼는 건누군가가 왔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는 일이 전부 시시하게만 느껴져식탁보를 접으며 너는 말했다주말 오후 티브이에선 무엇이든 해내는 아이들의 모습이 방영되고그때마다 우리는 식탁보를 바꿨다고단한 한 주였어너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계단에서 두 번이나 굴렀지만도와주는 이 없이 무릎을 털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고식탁보의 양끝을 맞대었다가 펴기를 반복하고 있다티브이 속 아이들은앞니가 빠진 얼굴로 엉성히 자신을 소개한 뒤에자랄 곳 없이 완벽한 음을 쌓아간다아이의 빛나는 결말이 그려지는오늘은 이렇게나 평범한데저애는 꼭 저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다잠자코 아이의 작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