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창한 봄이었습니다. 꽃들이 흐벅지게 하늘거리던 날, 오일장 전용 몸빼바지를 입으시고 세상에 둘도 없는 뽀오얀 걸음으로 읍내 장터를 향해 걸어가시던... 어머니, 그런 날이면 당신의 메마른 입술에 앵두보다 더 붉도록 윤이 나는 빨간 루주를 선물하고 싶었습니다. 식욕 왕성한 가난이 신물나게 슬어도 고깃국을 먹을 수 있는 장날이면 어머니, 당신의 그림자만이라도 먼저 돌아오길 동구 밖까지 내달리곤 했습니다. 이따금 벌 나비와 산새 소리가 날고 미루나무 꼭대기에는 바람만 붐비는데 한아름 가득 저녁놀을 안고 오시려나, 흙먼지 일던 하루가 구
시는 약속 없이 기다리는 친구 같습니다. 어느 순간 불쑥 얼굴을 내밀 그를 기다리다 찾으러 나섰습니다. 읽었던 책을 다시 꺼내 보다가 산책길 제멋대로 자란 풀섶을 기웃거리기도 하고 주인을 산책시키는 강아지의 늠름한 꼬리를 따라가 보고 천변에 늘어선 벚나무 잎새에 은밀히 당도한 가을을 엿보다가 멀리 나지막한 산 너머 번지는 노을을 바라보는 시간은 그대로 한 편의 시였습니다. 어둑해질 때까지 한참을 그 속에 서 있어도 한 줄 받아적지 못하는 저를 책망하는 날이 많았지만 그때마다 영원히 함께하겠다는 약속을 되새겼습니다. 시는 오랜 친구처
진분홍 꽃 무리가 금방이라도 산언덕을 태울 듯 붉어지면 축제는 시작되었다. 고기잡이 나갔던 배들이 들어오고 뽕할머니 제사 준비도 부산해졌다. 진달래꽃은 돌가자미라는 춤으로 쑥을 만나러 오고, 4월의 바다는 물을 벗기 시작했다.서망마을 바당곳, 무당이 물에 빠진 넋을 건져 올리고 있다. 징 소리가 요란하게 울어대다 파도에 쓸려 멀어지고 무가 소리는 끊어졌다 이어지며 바닷속에 누운 넋을 달랜다.‘어 이를 갈거나 어 이를 갈거나/ 이제 가면 못 오는 길 어서 바삐 가지 말고/ 불쌍하신 망자님 세 왕가고 극락 갈 제/ 천궁 없이 어이가리/
달팽이가 더듬이를 내밀었다. 사방이 풀밭인데 어디로 가는 걸까? 제 등을 옮기자니 한나절이다. 달팽이가 기어가는 길은 위험천만이다. 빠르게 이동하는 개미떼가 아무리 부러워도 눈길 한번 줄 수 없다. 잠시도 해찰부릴 수 없는 달팽이는 아무도 등 떠밀지 않았음에도, 이 세상을 기도하기위해 구도자의 길을 나선 어느 수도자와 비슷하다.나선형의 등을 지고 다니는 달팽이는 르네상스시대의 건축양식을 능가한 전위예술가요, 타고난 재주 또한 기묘하다. 아름드리나무에 빨판처럼 달라붙어있는 밀착성에 더하여, 곡예사처럼 유리벽을 오르내리는 아슬아슬한 면
여름내 입을 막아주던 마스크가 가을까지 건너갈 모양입니다.절제된 말 덕분에 눈이 밝아졌는지 아파트울타리 너머 애호박 꽃이 예쁘게 보이는 나날입니다. 어스름이 깔린 시간에 반가운 소식을 접했습니다. 간절함 뒤에는 부끄러움이 따르는 법이지요. 부족한 글을 눈여겨 읽어주신 심사위원님과 행사에 관련해 수고하시는 선생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어제보다 이른 시간, 사무실 문을 활짝 열었다.밤새 갇혀있던 무거운 공기가 밖을 향해 달려 나가고 떠난 자리는 찬 기운의 공기로 채워졌다.공기의 움직이는 방향에 따라 사무실 안은 차가워지고 산뜻해졌다.우려 놓은 녹차 한잔이 뜨거운 채로 소란스럽다. 안의 공기는 다시 뜨거워졌다.혼을 불러오는 일처럼 내 안도 뜨거워졌다. 첫 공모전의 동상 선정이라는 글자는 무당이 작두를 타듯 뜨거움을 일으켜 나를 칼날에 춤추게 했다. 더 좋은 글을 쓰라는 당부로 알고 좋은 글을 쓰도록 노력해야겠다.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린다.
초겨울에 접어든 늪은 사람의 발길이 끊긴 탓에 더욱 황량해 보였다. 마른 억새풀과 자잘한 나뭇가지로 뒤덮인 숲을 해치고 이곳에 도착했을 때 여자의 눈에 들어온 건 나뭇잎 따위의 부유물로 뒤덮인 늪이었다.두 달 전만 해도 늪은 지금처럼 한산하지 않았다. 명절을 맞아 고향에 내려온 사람이나 팔짱을 낀 연인이 늪 주변 생태공원을 배회하곤 했다. 여자가 기억하기론 군청에서 늪을 자연생태 관광지로 지정한 이래 이렇게 한산했던 적은 없었다.비가 오지 않아 늪 주변 풍경은 초겨울의 마른 지푸라기처럼 건조한 빛을 띤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여자는
늪을 처음 본 건 10여 년 전이다. 흐르지도 갇혀있지도 않은 생명의 보고, 그것이 주는 신비. 인공적 구조물이 주는 안락함을 벗어나 마주한 늪은 내게 경이로움과 안도감을 주었다.하지만 도심에 익숙한 나는 그런 곳에서 살지 못할 것이며 다행히 그런 곳에서 살아야 할 이유도 없다.옆에서 볼 때는 그저 편하고 안도감을 주는 자연도 막상 현실에 마주한 순간 생존을 위한 사투가 시작될 것이다.신비와 경이로움은 오간 데 없고 살기 위한 끔찍한 투쟁만 남겠지.그런 차원에서 글쟁이는 거짓말쟁이다. 대상의 다양한 본질을 외면하고 그저 보고 싶은
“제니”“제니”“제니”제니를 부르며 이쪽, 저쪽을 둘러보아도 보이지 않는다. 공중화장실 앞에 잠깐 세워 놓은 사이에 제니가 사라졌다. 언제나 손을 잡고 다녔지만, 남자 화장실까지 같이 들어갈 수는 없었다. 데리고 들어가, 휴대한 우산처럼 옆에 세워 놓아도 되겠지만 다른 사람들이 깜짝 놀랄 것이다. 언젠가 시장에서 강아지를 잃어버린 아내가 맨땅에 펄썩 주저앉았던, 기억이 스쳤다. 그는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하얗게 되면서 눈앞이 캄캄해졌다. 괜히 이곳으로 데리고 나왔다는, 후회가 가슴을 쳤다. 그게 얼마짜리인데? 순간적으로 엉뚱한 생각이
짧지 않은 삶을 살았지만 삶은 여전히 만만치가 않습니다. 어떤 일 때문에 심란해 하던 중 단비처럼 반가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늙은이의 헛된 상상력에 귀 기울여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나의 상상이 머지않은 미래에 명백한 현실이 될 것 임을 믿어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때가 되면, 독거노인들의 파트너 로봇을 맞춤 제작하여 정부 지원 사업으로 제공하면 좋지 않을까요? 노인들의 삶의 질을 한결 높여줄 수 있을뿐더러 집권 여당의 선거용으로도 딱 일 것입니다. 허접한 이야기를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옆에서 늦은 글쓰기를 응원해주는
물레 위 흙덩이에 온 마음이 놓였다. 미끄덩거리고 부드러운 촉감에 흙덩이를 불끈 잡는다. 손가락 사이에서 미어터지듯 삐져나와 버리는 것이 아쉬워 남은 것을 그러모아 다시 주먹을 쥐어본다. 시원하고 차진 흙의 감촉이 손끝으로 전해져 온다.그릇을 만들기 위해 질흙을 잘 반죽해 떼어 놓은 덩어리를‘꼬박’이라고 부른다. 두드리고 비비고 매만지며 썰질 할 땐 무엇을 만들지 기분이 들뜬다. 조형토를 주물러 도톰한 사발이든 너른 접시든 얼추 형체가 드러날 땐 설렘도 커진다. 옆자리의 도공은 빠르게 돌아가는 물레의 속도를 잊은 듯 혼신의 기를 모
슴베는 칼이나 호미, 낫 따위의 자루 속에 들어박혀 있는 뾰족한 쇠붙이를 말한다. 땅속에 묻힌 나무뿌리처럼 자루 속에 숨어서 농기구를 지탱해 날이 잘 들게 해준다.쇠붙이와 자루인 나무는 오행의 운행에서 금극목(金克木)으로 상극(相克)이라 한다. 낫은 나무를 쳐내고, 나무는 쇠붙이를 녹일 수 있어 상극이라는 것. 그런 상극관계인 쇠꼬챙이와 자루가 상생하여 온전한 낫이 되도록 해주는 역할이 슴베다.조선낫 슴베도 물푸레나무로 된 자루 안에 숨어 있다. 나는 산소에 벌초를 할 때는 아버지가 손수 만들어 사용했던 조선낫을 쓴다. 그 슴베 덕
주왕산에 화려한 단풍이 내려앉을 때, 주산지의 왕버들은 이파리 몇 개를 붙잡고 물에 반쯤 잠긴 허리를 굽어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요.겉치레를 아무리 해 본들, 떨어지는 낙엽 같기만 한데, 내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다 보면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되묻게 됩니다. 코로나로 세계가 불에 덴 듯, 그 난리를 치르는 동안, 술자리를 줄이고, 모임을 미루면서 만나게 되는 세상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앞으로는 외연의 확장보다 내면으로의 여행이 삶을 풍요롭게 할 것만 같습니다. 문학은 예술의 근본으로써 나 자신을 끊임없이 ‘꼬박’이
경북일보 문학상 운영위원회서 보내주신 금상 당선 문자를 받고 너무 기뻤습니다.기쁘면 눈물이 난다는데 제가 그랬습니다. 5년 전 대기업에서 명퇴한 뒤 제2기 인생의 주역으로 준비했던 험난한 문학도의 노력이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난 눈물이지 싶습니다.문학은 내 인생의 놀이터가 되었고 마음을 울리는 무대이기에 필력을 펼칠 수 있을 때까지 즐길 각오입니다. 더 높은 도약을 위해 용기를 잃지 말라는 격려의 상으로 여기겠습니다.40여 년 동안의 회사생활을 슴베로 근무했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낯선 용어라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
나는 작은 백팩을 매고 당신에게 가는 중이다. 바퀴달린 커다란 가방을 끌고 다니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손님이 거의 없고 소파가 푹신해 보이는 공항의 구석진 카페로 들어간다. 크로와상은 푸석푸석하고 커피는 맛이 없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나는 조용한 장소가 필요하다. 육 년 만에 서울에 간다는 것, 그리고 육 년의 시간을 뛰어넘는 비행이 겨우 한 시간 남짓 걸린다는 사실 때문에 나는 초조하다. 붉은 앞치마를 입은 카페의 여직원이 빗자루로 빵가루를 쓸기 위해 의자를 끌기 시작했을 때 나는 충격을 받는다. 철과 콘크리트가 마찰하는
당선 소식을 듣고 사 년 전 이순화 시인과 함께 제주도 지도를 펼쳐놓고 어디를 여행할지 계획을 세운 일이 떠올랐습니다. 시인의 시골 별장에서 우리는 대낮부터 캔맥주를 마시며 어떻게 생긴 숙소에 묵을지, 무슨 풍경을 볼지를 저마다 상상했습니다.자전거로 제주도를 한 바퀴를 도는 도중에 황금향의 달콤함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저는 황금향 농장에서 일하며 같은 농장에서 일하는 예멘 난민들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아예 제주도에 살게 되었습니다.지금은 서점에서 일하고 있지만 저는 제주도에서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습니다. 미술관 가이드, 리
저 서책을 오래 읽고 싶어서난 난독증을 앓았습니다구름이 흘리고 간 얼룩과 파도가 섞여겉과 속이 한통속이 된 페이지에는어둠 속에서 흘린 한숨도 음각되어 있었지요불안전한 삶을 조율하면서 새겨진단단한 문장을 오독 할 때가 많았고요소나기에 우산 꽃들이 처마 밑에서 피어나고습기에 입술이 퉁퉁 붓는 저녁이면그 눅눅함을 외면하기도 했었지요세상의 허기와 내 공복으로 쓸쓸한 날은저 서책이 닳고 닳을 때까지꼭 끌어안고 울고 싶었는데이제는 당신이 꽂혀있던 자리로내 몸이 기울고 있어요페이지마다 금강경처럼 박힌 글자들나에게 그 유전자가 옮겨붙어 나도한 권
저 한 겹 어둠은 실바람만 불어도 날아갈까 불안하지만, 사실은 막강하다. 깃털 같은 무게가 자신의 수천 배 무게를 품에 품고 달랑달랑, 오른손에 들려 허공을 건너가는 모습은 신기(神奇)에 가깝다. 안팎이 분간되지 않는 어둠은 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다. 굳이 깊이를 갖지 않고도 무한히 깊어질 수 있다는 걸 몸소 입증해 뵈고 있다. 저 어둠의 아가리로 들어간 것들은 깊이를 알 수 없는 깊이에 폭 잠긴다. 들어간 것들이 스스로 기어 나오기 전까지는 누구도 그 속내를 캐낼 수 없다. 햇살 한 줄기 용납하지 않는 저 숨 막히는 공간에서
훅 하고 입김을 쏟아 봉투의 입을 벌린다아득하고 깊은 속이 훤히 열린다오만 원 권 한 장으로 속을 채우기에는 속을 채우기에는외롭고 넓고 크다고만고만 서로 알고 지낸 사이에날씨 안부 같은 오만 원산자와 죽은 자의 숨결 사이에흰 장미 한 다발 놓는 것이이 봉투만 못해서 손끝으로 만지작만지작오만 원 권 한 장에 내 이름 석 자를 걸고 있는가켜켜이 쌓은 세월 아닐지라도간간이 만나 함께 먹은 밥 그릇 수적을 지라도어둡고 먼 길 홀로 가는 그녀. 달랑 얇은 봉투 한 장으로 전송 하려는가집 앞 꽃가게에 흰 장미 한 다발을 주문하고그녀를 만나러
시를 읽고 시를 쓰는 일이 무모하게 좋았습니다. 연필로 글씨 쓰기를 좋아해서 한꺼번에 많은 연필을 깎습니다. 연필 깎는 소리와 향기로 방안 가득 채워지면 신기하게도시는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 있다는 용기가 생기곤 했습니다. 부족한 저에게 상을 주신 경북일보 문학상 운영위원회와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립니다.경북일보 문학상 금상에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받고 써놓은 시를 들여다볼 때처럼 가슴이 불규칙하게 뛰었습니다.고맙고 고맙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