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무씨를처서 전에 땅에 묻지 않으면가을이 다 가도 밑이 들지 않는다고 한다그것은 무 맘이다땅에서는 귀뚜라미 등에 업혀 오고하늘에서는 뭉게구름 타고 온다며어떤 시절을 처서라고 하는 것은사람이다사람밖에 없다멀쩡한 천지에 금을 긋고그 이후와 이전을 따지는 것은생명을 엿보는 일이다그러나 무씨는 처서를 겁내지 않는다그는 저 자신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므로모래 알갱이만 한 그를아무리 지구라 해도 당할 수는 없다무씨는 힘이 세다[감상] 어제가 처서(處暑)였지만, 어떤 곳은 여전히 햇살이 구리철사처럼 날카롭다. 그래도 처서는 “땅에서는 귀뚜
밤길 갈 때는 가로등 이다울고 싶을 때는 구석이다끝없는 잔소리꾼 이다놀랄 때 부르는 감탄사다나를 감시하는 카메라다떨어져 있을 때는 그리움이다또 하나의 손이다만져지는 마음이다엄마는 비유할 수 없는 고유명사다그래서 엄마는 엄마다[감상] 벌써 몇 년 전이다. 박승우 시인의 동시집 『말 숙제 글 숙제』(2016, 학이사)를 읽다가 「엄마는 □□ 다」를 독자들에게 꼭 읽어줘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소개한다. 우리 아이들은 저 빈칸에 뭐라고 썼을까? ‘엄마는 (일벌레)이다, 엄마는 (경호원)이다, 엄마는 (촛불)이다, 엄마는
쌍둥이자리나 처녀자리 혹은 물병자리가잘 보이는 곳에 천막을 친다말뚝을 박는다는 것은지상의 별자릴 만드는 것이다천막은 벽이 없어 바람이 드나들기 좋고하늘을 쳐다본다는 것은별의 힘을 빌리고 싶어서다점성술사처럼 별의 운행을 읽고 싶어서다북두칠성 견우별 직녀별 좀생이별들을 찾아은하계를 맴돌다가천상의 지도를 꺼내놓고내가 가보고 싶은 별들을 찾아보았다별빛구름을 따라가다 보니돌고, 돌아저승까지 동행하는 북두칠성 자루가남쪽을 가리킨다먼 바다에는 밤 고래들이 울고 있다이 계절엔 남서풍이 드나들기 좋게사방이 확 트인 천막을 치자마른 풀이 있는 곳에쌍
중국의 선비가 한 기녀를 사랑하게 되었다.그 기녀는 선비에게,“선비님께서 만약 제 집 정원 창문 아래서의자에 앉아 백 일 밤을 기다리며 지새운다면,그때 저는 선비님 사람이 되겠어요”라고 말했다.그러나아흔아홉 번째 되던 날 밤선비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팔에 끼고 그곳을 떠났다.[감상] 김소연 시인의 시집 『눈물이라는 뼈』(2009, 문지)를 읽다가 시집 해설에 소개된 중국 옛이야기를 읽고 매혹되었다. 원문은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2004, 동문선)에 실려있다. 롤랑 바르트는 “기다리는 사람은 기다림의 대상을 사랑한다. 사
교실 바닥에서걸레끼리 부딪친다교사도 걸레질교탁과 칠판의 50%가 학생의 몫인 것처럼걸레의 50%도 교사의 몫교실 바닥에 눌어붙은 껌도, 침도, 녹아 끈적한 사탕도우리 모두의 것교실 바닥에는우울, 졸음, 짜증, 자학, 무기력, 얼룩도 널려 있다자폐와 분노조절장애의 욕설과 핏물도 묻어 있다종이비행기가 된 교과서도 있다코피를 닦아낸 빨간 휴지도 있다교실의 쓰레기통에는두통약, 복통약, 독감약, 알레르기 비염약, 결막염약, 신경안정제가뱀 허물처럼 널려 있다걸레도 교육이다닦는 것도 교육이다[감상] 교실은 꿈과 환상이 넘치는 동화적 공간이 아니
사랑도 없이 귀신이 되어가는 세월시를 쓰기엔 인생이 너무 짧은 건 아닐까변명을 횃불처럼 들고 찾아가는 산 82-5번지 모래 사원염주를 주렁주렁 목에 걸고 있는 개미귀신이란 놈은시체애호증이 있어서집 가까운 곳에 마른 피육을 쌓아놓는다침침한 눈으로 머리카락을 골라내듯 언어를 골라내기엔너무 늦은 저녁, 신경쇠약으로 잔뜩 찡그린 얼굴로어제 먹다 남은 말을 마저 먹는다, 아득바득시를 쓰기엔 인생은 너무 불쌍하지 않은가수도복을 입은 개미귀신들이 미사라도 보는 걸까모래 속에 몸을 납작 엎드린 채 울고 있다부스스, 내 손에서 사라지는 고운 모래의
갯벌로 꼬막 잡으러 갔다빠질 것 같아옷 다 버릴 것 같아오도카니 있는데먼저 들어간 할머니가 소리쳤다빠져야 잡제!버려야 잡제!그라고 멀쩡하믄 암 것도 못 잡는다잉잠시 망설이다 갯벌로 들어갔다뻘로 범벅이 된 내 손안에꼬막이 한가득이다[감상] 안오일 시인의 그림 없는 동시집 (브로콜리숲)은 삶에 대한 어린 화자의 질문과 할머니, 할아버지의 응답으로 이루어졌다. 삶의 연륜에서 나오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지혜로운 말씀은 있는 그대로 한 편의 시가 된다. 시집 제목인 ‘뽈깡’은 ‘있는 힘껏’이라는 전라도 방언이라고 한다. 시인은 “지
딸아 딸아내 따라다라관음(多羅觀音)눈물에서 태어난 보석아눈에 도로 넣어도 아프지 않을영원한 소녀버들잎 방울방울 초록의 아픔으로남몰래 떨어지는눈물방울아기쁨으로 꽃을 피우고슬픔과 고통으로 씨앗을 맺는따라따라내 딸아마른 땅을 적시는영롱한 강물아[감상] 시인에 따르면, 우리말 ‘딸’의 어원은 범어(梵語), ‘따라(tara, 多羅)’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관세음보살의 눈물방울 속에서 태어난 영원한 소녀, 눈물방울 속에서 태어난 ‘다라관음(多羅觀音)’인 것이다. 올해 13살이 된 외동딸을 키우는 아버지로서 ‘딸’을 떠올리면 가슴이 뭉클하다.
내 안을 허락한다는 것.너에게 내 몸을 열고 싶다는 것 내 혀와 이빨과 목구멍과대장과 항문을 열어준다는 것 그렇게 음탕한 생각.또한 지금의 내가 아니고 싶다는 것 지금의 죽음이고 싶은 것다른 나이고 싶다는 것 사랑을 느낀다는 것.너를 내 안에 넣고 싶다는 것 네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것너이고 싶다는 생각 네가 아닌 나를 더는 견디지 않겠다는 의욕.너를 먹네.포충식물처럼 끈끈하게. 세포 하나하나까지 활짝 열어 너를 맞네.세포 하나하나까지 너에게 내주네.그러므로 허락이 있어야 하는 일 모든 구애가 그렇듯이밥이건 고기건 사람이건 먹는다
내 헐벗은 마음은 한 마리 부엉이못 박히고, 뽑히고, 다시 박히고.피도, 열의도 끝장났구나.누구든 사랑만 해주면, 나는 감지덕지[감상] 기욤 아폴리네르는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은 흐르고/ 우리네 사랑도 흘러내린다/ 내 마음속에 깊이 아로새기리라, 기쁨은 언제나 괴로움에 이어옴을.//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는 머문다.”를 쓴 시인이다. 시 ‘부엉이’가 실린 은 1911년 화가 라울 뒤피와 함께 냈다. 총 30편의 시와 30점의 판화를 수록한 이 시집은 시와 판화가 하나의 동물을 통해 인생을 은유한다
아이들이구름버스를 타고를 달려요는 넓고는 갈 곳이 많아요스마트폰 세계, 상상의 나라수다의 방, 멍 때리기 공간……끼이익,수학 학원에 도착했네요구름버스는 떠나고도 사라지고아이들이 학원 가방을 들고 들어가요[감상] 방학(放學)의 ‘방(放)’은 ‘놓다’라는 뜻이다. 방학은 공부를 내려놓고 몸과 마음의 휴식, 충전을 위한 소중한 시간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여름방학 특강’이라는 사슬에 묶여 이리저리 끌려다닌다. “멍 때리며, 구름버스”를 탈 시간이 없다. 학원버스에 실려 “계획대로”
붙어서 우는 것이 아니다단단히 나무의 멱살을 잡고 우는 것이다숨어서 우는 것이 아니다반드시 들키려고 우는 것이다배짱 한번 두둑하다아예 울음으로 동네 하나 통째 걸어 잠근다저 생명을 능가할 것은 이 여름에 없다도무지 없다붙어서 읽는 것이 아니다단단히 나무의 멱살을 잡고 읽는 것이다칠 년 만에 받은 목숨매미는 그 목을 걸고 읽는 것이다누가 이보다 더 뜨겁게 읽을 수 있으랴매미가 울면 그 나무는 절판된다말리지 마라불씨 하나 나무에 떨어졌다[감상] 바람 한점 없는 여름, 구미 금오산을 오른다. 해발 976m지만, 만만한 산이 아니다. 대혜
시를 써서, 만약에돈을 벌게 되어 근교 어디쯤에 집을 사게 된다면나는 마당에 뒤란에 담장 옆에해바라기를 엄청나게 많이 심을 것이다 하여이웃들이 해바라기집이라고 부르고잠깐 다니러 온 이들도 우리집을 보며 해바라기집이라고 부르고머리 희끗희끗한 내 처가 출퇴근하는 것을 보고는논 건너 아랫마을 분이 ‘저기 해바라기집 안사람이야’라고 소개하고아들도 해바라기집 아들로 불리고친정 나들이하는 딸도 해바라기집 딸로 불리고가끔 호주머니에 돈이 없어 외상 신세지는동네구멍가게 장부에도 ‘해바라기’로 적히도록해바라기를 많이 아주 많이 심을 것이다마당이 온
두 무릎과 두 팔을 땅에 대고 머리를 숙여 바닥에 있는 나에게 말하노니, 내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왕십리역 지하도에서 무릎을 꿇고 하모니카를 부는 아라한에게 종이쪼가리 한 장을 던져 준 것이 내 마음이었더냐. 고독사로 보름만에 발견된 시인의 장례도 찾아가지 못하고 노란 잎이 다 떨어진 해바라기에물이나 주는 내 마음의 정체는 어디에 있는 것이냐. 빛을 그늘이라 부르고 걷는 것을 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은 정녕 나에게서 나온 것이더냐. 시간과시각과 시계를 구분하지 못하고 사이와 간격과 간극도 모르며 세상과 경계를짓고 짐짓 팔짱을 끼
이제 우리 밀고 당김을 시작해보자 밀고 당김으로 밀어를 속삭이자 밀고 당김으로 허공을 깨뜨리자 달콤한 마음을 망가뜨리자 밀고 당김으로 몸을 굽히지 말자밀고 당김으로 착각하자 밀고 당김으로 춤을 추자 밀고 당김으로 시선을 빼앗자밀고 당김으로 정지선을 넘어가자 밀고 당김으로 꽃잎처럼 흩날리자 밀고 당김으로 발을 내딛자 아니면 넘어지자 밀고 당김으로 실수하지 않는 실수를 반복하지말자 밀고 당김으로 무해한 뇌를 선물하자 밀고 당김으로 모국어를 잊자 온 힘을다해 하찮아지자 밀고 당김으로 눈앞이 하얘지자 밀고 당김으로 이정표가 되자 밀고 당김
신라 왕릉은 작은 산이다여름내 풀이 자라 장발이 된 왕릉기계로 여럿이서 풀을 깎는다왕릉 위 사람들이 개미만 하다왕릉에서 꼬물꼬물 소인국 사람“임금님! 풀 깎는 소리 시끄럽죠?”금관을 쓰고 누운 임금님 대답,“괜찮아, 시원하다. 아주 시원해.”개미 사람 수십 명이하루 걸려서장발 왕릉을 이발시켰다[감상] 시울림주간을 맞아 시 낭송 강사 두 분을 학교로 모셨다. 형편이 된다면 학급당 시수를 많이 배당하고 싶었지만, 학급수가 워낙 많아 그럴 수가 없었다. 학급당 최소 4시간에서 6시간은 해야 아이들이 시 낭송의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하고돌아누워 버리는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지구를 다 돌아다녀도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이 남자일 것 같아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가장 많이 먹는 남자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감상] 정신과 의사 김혜남은 에서 “부부관계의 가장 큰 비극은 서로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씨앗을 품고 공들여 보살피면언젠가 싹이 돋는 사랑은 야채 같은 것그래서 그녀는 그도 야채를 먹길 원했다식탁 가득 야채를 차렸다그러나 그는 언제나 오이만 먹었다그래 사랑은 야채 중에서도 오이 같은 것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그는 야채뿐인 식탁에 불만을 가졌다그녀는 할 수 없이 고기를 올렸다그래 사랑은 오이 같기도 하고 고기 같기도 한 것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그녀의 식탁엔 점점 많은 종류의 음식이 올라왔고그는 그 모든 걸 맛있게 먹었다결국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그래 사랑은 그가 먹는 모든 것[감상] 가수 양수경은 ‘사
심약한 밤이야성냥만 그어도 찢기는 새벽, 자신을 의심하며 부러지는 연필심나를 해하려 골몰하며 손가락을 깎는 기분을훅― 불어 끄면서창밖으로 쏟아질 생각만 하는나는 너무 묽은 피, 내외가 불분명한 가장 사사로운 상대웃기지?창밖, 제 아랫도리를 빤히 훔쳐보는 가로등겨드랑이에 코 박고 다리 사이에 취한 개의 미간우린 왜 일그러진 데를 좀 더 일그러뜨리는 자신을 쓰다듬고 말까모두들 쪼그리고 앉아 목을 꺾고어머, 꽃 좀 봐사타구니에 얼비치는 자신을 훔쳐보며민감하고 부끄러운 막대기를 직신거리다가 체온 재고 심박에 끌려다니는 자신을 잔에 따르고우
상처라는 말보다는흠집이라는 말이 더 아늑하다마음에, 누가 허락도 없이집 한 채 지어 놓고 간 날은종일 그 집 툇마루에 걸터앉아홀로 아득해진다몇 날 며칠부수고 허물어낸 빈터에몇 번이고 나는,나를 고쳐 짓는다[감상] 권상진 시인 덕분에 ‘흠집’이란 말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흠집(欠집)’이다. 하품 ‘흠(欠)’이라는데, 사람이 크게 하품하는 모양을 본뜬 글자라고 한다. 하품은 몸에 산소가 부족해서 생기는 신체 반응인데, 그런 이유로 ‘하품’, ‘부족하다’, ‘빚’, ‘흠’, ‘결함’까지 뜻하게 되었다고 한다. 흠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