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원(金孝元·1542∼1590)은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구미로 와서 사는 동안 여러 향토사, 향토문화 자료를 섭렵을 하였으나, 그가 선산 출신이란 것을 몰랐다. 그는 선산[일선] 김씨의 후예이다. 어느 날『일선지』를 보다가, 그가 그인가? 라며 혼자 놀랐다. 주변에서 아무도 말해주지 않으니, 관심이 없어서인가? 동서 분당으로 나라 망했다는 논리에 숨을 죽이는가? 아니면 집안에 어떤 사정이 있었는가? 여전히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후손의 입장에서 그를 그렇게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는가? 의심해 볼 뿐이다.『일선지』에는 두
『일선지』의 백미(白眉)는 인물에 관한 기사들이다. 좀 과장하면 우리의 ‘사기 열전’이라 할만하다. 2권「인물」편은『일선지』의 1/4 분량이며, 3권 행장과 묘갈, 4권 잡저, 행장, 제문, 만장, 시 등 인물 관련 기사를 포함하면 전체의 3/4 혹은 4/5가 선산 관련 인물에 관한 이야기 들이다.『일선지』를 연구한 금오공과대학교 박인호 교수에 따르면, 인물 관련 항목에 수록된 인물의 수는 후비 4, 선현 12, 훈열 234, 숙행 34, 기예 2, 효자 11, 열녀 7 [신증] 효자 3 열녀 17 등 총 324명이 수록되어 있다.
『일선지』「방리(方里)」조는 동네 이름을 싣고 있는데, 그 가운데 지명을 독특하게 소개한 곳이 있다. 전문이 많지 않으므로 모두 소개하고자 한다.자개라(者開羅)남쪽 40리에 있다. 개령(開寧)의 산관촌(山官村)과 접해 있다. 임진왜변에 사인(士人) 강복수(康復粹)가 이곳에서 시묘하면서, 마을의 산척(山尺) 정팽원(鄭彭元) 등에게 의병을 일으켜 토적(討賊)하길 권하였다. 팽원이 그 무리 5∼6명의 역사(力士)와 마을 백성 50여명을 모아서 금오산을 근거지로 의병(?兵)을 만들고 마을 어귀에 복병을 설치하였다. 만약 노략질하는 왜적을
동양의 고전으로 사마천의『사기』, 우리의 고전으로『삼국사기』,『삼국유사』, 『열하일기』등이 운위되나, 숨어있는 고전을 찾아서 읽는 데는 인색하다. 지난 100년의 제도적인 교육과정이 그러하였고 다른 세계의 물질문명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우리 문명의 유산을 돌아보는데 소홀히 대하는 태도를 길러 왔다. 4차 산업혁명시대를 맞이하여, 이러한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맞은 것 같다.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 문집목판과 같이 우리에게는 수많은 기록 자료들이 남아 전하며, 이들은 독자를 기다리고 있다. 특히『동국여지승람』에서『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