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산천 떠나고자 하랴만 세월이 하수상해 올동말동 하여라

▲ 청원루는 병자호란때 청나라 심양으로 압송됐던 김상헌이 귀국한 뒤 세운 누각이다.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은 병자호란때 청나라와의 굴욕적인 강화를 반대하며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한 척화론자였다. 화의를 청하는 최명길의 국서를 찢었고 굴욕을 견디지 못해 목을 매 자살까지 시도했다. 자살 시도 전 그의 스승이며 맏형인 김상용이 강화도에서 화약고에 불을 질러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삼전도의 굴욕이 끝으로 전쟁이 막을 내린 뒤에도 그는 청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청나라가 조선의 군사 5천명을 징집해 명나라를 친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전쟁이 끝나고 3년 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청나라가 김상헌을 심양으로 압송했다. 그의 나이 71세였다. 북쪽으로 가던 길에 인조가 내시를 보내 표피 갖옷과 친필로 쓴 편지를 보내왔다. “꼭 서로 만나보자 하였으나 불편하여 만나지 못한다” 편지를 받은 그는 처참한 심정을 시로 남겼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만은
시절이 하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그는 6년 동안 심양의 감옥에서 고초를 당했으나 조선 선비의 절개를 지켰다. 오히려 그를 심문하는 청나라 벼슬아치들을 감동시켰다. 청나라 장수 용골대가 김상헌에게 물었다. 조선 군사5천명을 징집해 명나라를 치려고 할 때 김상헌이 반대한 일을 따졌다.

“네가 수군을 우리나라에 보내지 말하고 한 것은 무슨 까닭이냐”

김상헌은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드러누운 채 말했다.

“내가 수군을 보내지 말라고 했으나 조정에서 내 말을 듣지 않았으니 너희들이 이루지 못한게 무엇이냐. 또 임금과 신하 사이에 사사롭게 서로 이야기 한 일을 타국 사람이 따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심양에서 죽으리라던 김상헌은 살아서 돌아왔다.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청태종이 아들을 낳고 그 기념으로 사면을 실시했다. 홍서봉이 용골대에게 사면령을 김상헌에게도 적용시켜줄 것을 간청했고 사면이 받아들여졌다. 76세였다.
김상헌 시비. 청나라 심양으로 압송될 때 심경을 읋었다.

청원루는 6년 만에 오랑캐의 감옥에서 풀려난 김상헌이 안동 소산시 풍산읍 소산마을에 지은 누각이다. 본래 중종때 평양서윤을 지낸 김상헌의 증조부 김번이 여생을 보내기 위해 지은 건물인데 김상헌이 누각으로 고쳐 지었다. ‘청원’은 청나라를 멀리 하겠다는 뜻이다. 우리나라 정자 편액에 붙여진 ‘청원’은 송나라 주돈이의 ‘애련설’에서 취했다. 주돈이는 연꽃을 군자에 비유했다. ‘비록 진흙에서 나왔지만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맑은 물에 씻겨도 요염하지 않으며 속은 비었지만 겉모습은 곧으며 넝쿨도 가지도 없이 향기는 멀어질수록 맑으며 꼿꼿이 맑게 심어져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어도 가까이 가서 만질 수는 없는 존재’라고 노래했다. ‘향기는 멀어질수록 맑아진다 香遠益淸’이 원전이다. 김수온이 기문을 쓴 전남 순천의 청원루도 서거정이 쓴 충청도 청안의 청원정 기문도 주돈이의 ‘향원익청’에서 정명을 취했다고 밝히고 있다. 청나라를 철천지 원수로 여긴 김상헌은 ‘향원익청’의 청원을 비틀어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청원루는 가운데 몸채를 중심으로 양쪽에 날개모양의 익사를 설치했다.
청원루 우익사. 몸채는 기단을 쌓아 단층으로 만들고 익사는 누하주를 두어 누각형태로 지었다.
편액 글씨를 놓고는 의견이 갈린다. 편액 글자 옆에는 편액 글씨를 쓴 사람이 ‘회옹(晦翁)이라고 적고 있다. 회옹은 누구인가. 첫 번째 주장은 청음의 손자 곡운 김수증의 장인이며 김상헌의 문인인 회곡 조한영이라는 설이다. ‘회곡’의 ‘회’에다 늙은이 ‘옹’을 썼다는 말이다. 김상헌과 조한영은 함께 심양으로 잡혀갔다. 두 사람은 그때 주고 받은 시를 시집으로 엮었는데 ‘설교수창집’이다. 다른 하나는 송나라 유학자 주자라는 설이다. 주자의 호가 ‘회옹’이었던 것이다. 주자의 글자를 집자했다는 말이다. 김상헌이 어릴 때부터 주자가 편한 ‘소학’을 읽고 실천덕목으로 삼았기 때문에 설득력을 얻고 있다.

누각은 좌우건물은 누하주를 길게 내려 중층으로 만들고 몸채는 기단을 높게 올려 단층으로 앉혔다. 다락집이면서 ‘ㄷ’자 형상을 한 독특한 형태다. 몸채를 중심으로 좌우로 뻗어나간 누각은 날개를 닮았다고 익사라고 한다. 몸채는 대청마루를 가운데 두고 양툇간에 온돌방을 배치했고 몸채 대청 앞면을 한단 낮게 해 마루를 2단으로 설치했다. 독특하다.

청원루가 있는 소산마을은 본래 금산촌(金山村)이었다. 안동김씨 집성촌이다. ‘앞에 큰 들이 있고 땅이 기름져 온갖 곡식이 잘 된다’고 《영가지》는 기록하고 있다. 김상헌은 김씨 집성촌이름을 금산촌이라고 하는 것은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느낌이 들어 온당치 못하다’며 소산리로 바꿨다. 소산은 ‘검소하고 신의를 중하게 여기는 씨족이 사는 마을’이라는 설과 마을을 감싸고 있는 소요산의 이름에서 따왔다고도 하고 소요산이 소가 누워있는 모양을 하고 있어 그렇게 부른다는 설도 있다. 소산마을에는 청원루 외에도 삼구정, 안동김씨 종택, 선앙동김씨종택 묵재고택 동야고택 비안공구택등이 있어 유서깊은 마을임을 증거하고 있다.

청원루 인근의 삼구정 일대. 김상헌은 이곳에 자주 들러 삼구정 팔경시 등을 남겼다.
김상헌은 청원루에서 지척에 있는 삼구정에 자주 들렀던 모양이다. 삼구정은 동오동산이라는 작은 구릉 위에 있어서 풍산들을 한눈에 내려보기 좋은 곳이다. 삼구정은 김영수 김영전 김영추 삼형제가 노모 예천권씨의 장수를 기원하며 지은 정자다. 김영수는 노모가 세상을 떠나자 한양 장의동으로 이거를 하였는데 아들 김영과 김번이 문과에 급제했다. 김영은 소산마을로 낙향해 소산파의 파조가 됐고 김번은 장의동에 살면서 장동김씨 파조가 됐다. 김상헌이 김번의 증손자다. 김상헌은 증조부의 흔적이 있는 삼구정에 올라 풍산들을 바라보며 시를 짓곤 했는데 대표적인 작품이 ‘삼구정팔경’이다. ‘비개인 뒤 학가산의 맑은 봉우리, 마애산의 깍아지른 듯 한 절벽,현리의 자욱한 봄 경치,겨울철 역동의 푸른 노송 넓은들판의 누렇게 벼가 익어가는 풍경, 낙동강가에서 그물로 고기잡는풍경, 더운 삼복기간 정자에서 더위를 피함 중추가절에 감상하는 달’이다. 안동에서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지만 굴욕적인 항복에 대한 회한이 씻겼을 리 없다. 그는 괴로운 마음을 시로 담았다.

나라는 다 깨진 뒤 몸만 남쪽으로 내려와서
사람 만나 당시 일을 말하려니 부끄럽다
사립문에 기대어 새로 뜬 달을 바라보니
누가 산중에 있는 이 늙은이의 마음을 알겠는가

김상헌이 죽은 뒤 청원루도 퇴락했던 모양이다. 김상헌의 손자 김수증이 청원루를 돌아본 뒤 ‘화산기’에 글을 남겼다.“ 저녁에 소요산素山에 도착해서 곧바로 삼구정에 갔다. 정자 앞에는 교목 한 그루가 있다. 세 개의 거북돌은 우뚝하지만 오래된 소나무는 거의 다 꺾이었다. 곧장 옛날 지내던 집으로 들어가니, 나무가 썩고 기울어 거의 지탱할 수 없었다. 동쪽 각 몇 칸은 서윤 선조(김번)께서 독서하셨던 곳인데, 우리 형제가 어렸을 때 한 이곳에서 책을 읽었다. 작은 방은 할아버지(김상헌)께서 거처하셨던 곳인데, 지금은 하인이 지키며 살고 있었다. 방과 뜨락은 황폐해져 발을 붙일 곳도 없었다. 집 오른쪽에는 우물이 있으며 우물가에는 대추나무 한그루가 옛날 그대로 이다.”

청원루
김상헌의 호 ‘청음’은 ‘소나무와 대나무 등의 시원한 그늘’을 운치 있게 표현한 말이지만 또다른 의미가 있다.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1동은 김상헌의 또다른 은거지인 석실이 있는 곳, 미음이다. ‘청음’은 ‘맑고 깨끗한 미음마을’을 뜻하기도 한다. 그의 다른 호 ‘석실산인’은 여기서 나왔다. 김상헌이 죽은 뒤 후손들이 이곳을 세거지로 삼아 살면서 ‘석실서원’을 세워 그의 위패
▲ 글 사진 / 김동완 여행작가
를 모시고 봄 가을로 제사를 지낸다. 17~18세기 조선의 학계와 문단을 주도한 대학자와 문장가가 많이 배출됐다. 인재 중에서도 그의 손자와 증손자 등 9명을 ‘삼수육창’이라 부른다. 손자 3명은 ‘수’자 돌림이고 증손자 6명은 ‘창’자 돌림이다. 담헌 홍대용, 연암 박지원도 석실서원 출신이다. 김상헌의 후손인 미호 김원행의 제자다. 조선의 3대연행록은 김창업의 ‘노가재연행록’ 박지원의 ‘열하일기’ 홍대용의 ‘담헌연기’이다. 이들 모두 석실서원 출신이다.
김상헌은 석실에서 세상을 떠나기전 까지 청나라에 대한 원한을 가슴에 새기고 살았다. 그는 끝까지 북벌론을 주창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효종으로부터 군주에 버금가는 대우를 받았고 효종의 묘정에 배향됐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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