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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식 새경북포럼 포항지역위원회 위원·시인

인생길은 곧잘 마라톤에 회자된다. 감정의 기복을 겪으며 장시간 달리는 고된 운동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강인한 투지와 끈기가 요구되고 모두들 비장한 표정으로 레이스에 임한다. 올림픽의 꽃이라 불리는 마라톤 경주는 인간이 의지의 동물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스포츠이기도 하다.

‘로마인 이야기’의 일본 작가 시오노 나나미가 쓴 ‘그리스인 이야기’ 제1권에는 페르시아 전쟁이 펼쳐진다. 그녀는 간결한 문체와 적절한 비유, 그리고 나름의 독특한 해석으로 흥미진진하게 세계사를 다룬다.

마라톤 전투는 기원전 490년 무렵 제2차 페르시아 전쟁 때 아테네 군이 페르시아 군을 대파한 싸움이다. 밀티아데스 장군이 지휘한 아테네 군은 대담한 포위 작전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이는 동서양이 충돌한 최초의 전쟁으로 평가된다.

고사에 의하면 아테네의 전령 페이디 피데스는 마라톤 평원에서 아테네까지 사십 킬로미터를 역주했다. 그는 아테네에 도착하자마자 ‘우리가 이겼다!’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숨졌다. 인류사 첫 마라토너이자 영웅의 탄생이다.

하나의 사건이 태양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월광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고 했던가. 마라톤 경기가 그랬다. 근대 올림픽 대회를 부활시킨 쿠베르탱 남작은 이런 옛일을 전해 듣고 정식 종목으로 채택했다. 또한 페이디 피데스가 달렸던 거리를 경기 거리로 정했다.

사적으로 마라톤은 친근하게(?) 다가오는 개념이다. 열정적 마니아인 막내 동생의 영향 탓이라고나 할까. 울퉁불퉁한 허벅지 근육과 활력이 넘치는 삶의 자세를 대하면 경외감이 차오른다. 그는 우연한 기회로 사십 중반의 나이에 입문했다. 엄청난 체력이 필요한 취미 활동이라 나조차도 처음엔 만류했다. 하지만 시나브로 중독되듯이 마라톤에 빠져들더니 이젠 소중한 일상이 되었다.

처절할 만큼 외로운 마라톤이 생활의 활력소가 된다니 아이러니다. 일에 지치고 머리가 무거울 때 한바탕 달리노라면 엔도르핀이 샘솟는 청량감에 젖고, 완주가 끝났을 때의 성취감은 심장이 터질 듯한 환희라고 전한다. 실제로 유산소 운동은 우울과 고민을 해소하는 기능을 가졌다.

미국 보스턴 출발선에 서 보는 것이 꿈인 그는 팔 년 동안 풀 62회를 뛰었다. 일본 교토마라톤과 태국 방콕마라톤에도 다녀왔다. 코스 양쪽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풍광을 즐기는 색다른 해외여행. 동호회엔 300회 기록을 앞둔 분도 있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부부는 서로 닮아 간다고 하던가. 덩달아 부창부수. 남편을 따라서 전국을 다닌다. 울트라 100km 2회를 완주한 실력이니 아마조네스가 따로 있으랴.

그리스 아테네의 파나티나이코 스타디움은 제1회 근대 올림픽이 개최된 곳이다. 입구엔 삼성에서 설치한 안내판이 놓여서 감회가 새롭다. 안쪽에 세워진 나신의 조형물이 기억난다. 노인과 청년의 양면 조각상인데 거시기가 인상적이다. 청년은 아래로 쳐졌고 노인은 꼿꼿이 섰다. 신체 나이는 운동이 좌우한다는 메시지.

아침저녁 갈바람이 선선하다. 풀벌레 울음이 애달픈 시절이다. 마라토너는 30km 정도 구간에서 은연중 한계가 온다고 말한다. 나약해지는 의지를 추슬러 심기일전 목표를 마주한다. 마라톤에 비유하자면 올 한 해도 삼십 킬로미터 가량 지났다.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한 뒷심을 발휘해야 할 즈음이다. 한 번쯤 장거리 달리기로 자신을 시험하고 존재감을 느껴 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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