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흥지에 뜬 달빛에 반하고 은은한 연꽃 향기에 취하고 옛 선비들 흥취가 절로~
남천이 이천으로 이름을 바꾼 이는 고려 태조 왕건이다. 임원준은 애련정기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 이천 고을이 고구려때는 남천이었는데 뒤에 신라의 영지가 되어 남매군이라가 이름하고 군주를 두어 다스렸다. 또 황무군으로 고쳐 주위에 있는 여러 현을 관령하였다. 왕태조가 남으로 정벌할 때 대군을 거느리고 군에 이르니 서목이란 이가 인도하여 남천을 무사히 건넜다. 태조가 기뻐하여 지금 이 칭호를 주었다. 또다른 이야기로는 태조가 후백제를 치려할 때 이 고을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점을 치자 이섭대천(利涉大川), 즉 ‘주역’에 자주 나오는 말로 ‘큰물을 많이 건널수록 좋다’는 점괘를 얻었기 때문에 이천이라고 불렀다 한다”
안흥지는 이천의 구만리들 논과 밭에 물을 댔다. 천하제일의 미질을 자랑하던 자채쌀은 안흥지에서 나왔다. 왕실 진상품이었다. 이 때문에 고려 조선시대 조정대신들이 안흥지 앞 자체 논을 가지는 것을 큰 자랑으로 여겼다고 한다. 구만리 들판의 젖줄이었던 안흥지에 애련정이 있다.1474년(성종 5) 이천부사로 부임한 이세보가 세웠다. 애련정의 이름은 당시 영의정이던 신숙주가 지었다. 애련정은 염계 주돈이의 시 ‘애련설 愛蓮說’에서 따왔다.
1779년에 정조가 여주행궁에 갔다. 이때 정창성과 애련정에 대해 대화를 나눈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나온다.
“행궁의 뜰 가에 연정이 있는데 이것이 이른바 애련정인 것인가?“
“애련이라는 이름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 되어 국초부터 전해오고 ‘여지승람’에도 실려 있으며 지금도 임원중이 지은 기문이 있습니다”
“애련의 뜻은 주염계의 애련설에서 딴 것인가? 이 정자를 세운 것은 어느 때인가?”
“고을 안의 고로에서 물으니 이세보가 처음 이 정자를 세웠고 신숙주가 애련이라 편액하였다 합니다.”
“풍월정집(월산대군의 문집)에 ‘파서 새 못을 만들고 연도 심으니, 풍류 사랑스럽고 주인 어질다’라 한 것이 있는 데 이 정자를 이른 것인가”
“그렇습니다”
정자는 호수 가운데에 있다. 호수 양쪽 옆에는 커다란 버드나무가 시립하듯이 서 있다. 푸른 호숫물에 비치는 버드나무와 정자가 아름답다. 정자를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호수와 연결하는 다리를 두었다. 호수 정면에는 연꽃을 심어 이곳이 애련정 테마를 잘 부각시키고 있다.
정자 안에는 성종의 형 월산대군이 쓴 시와 서거정 김진상 조위 강경서 등 당대의 문장가들의 시가 걸려 있다. 도심 한가운데 왕이 다녀가고 조선의 대문장가들이 시를 쓴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것은 얼마나 소중한 도시의 자산인가.
그 누가 염계를 뒤이어 애련을 말했는고/ 정자를 명명함이 옛 현인에 꼭 부합되네/ 그대는 응당 덕을 닮아 평생 좋아했겠지/ 나는 또한 속 텅 빈 걸 죽도록 사랑한다오/ 열매가 말처럼 둥글단 말은 이미 들었지만/ 꽃이 피어 배보다 큰 것도 일찍이 보았네/ 다시 재배하는 노력을 열심히 기울이게나/ 풍월 실은 장래에 흥취를 주체 못할 걸세
- 서거정의 시 ‘애련정’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