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흥지에 뜬 달빛에 반하고 은은한 연꽃 향기에 취하고 옛 선비들 흥취가 절로~

안흥지에 세워진 애련정은 봄에는 벚꽃 여름에는 연꽃이 인기가 높다.
경기도 이천은 신라와 백제 고구려 삼국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한강이 수중에 들고나고는 이천의 주인이 누구인가에 달려 있었다. 신라 진흥왕(568년)이 이천의 지금의 도청 소재지격인 남천주를 설치했다. 고구려 땅 남천현이었는데 진흥왕이 정복전쟁을 벌여 땅을 빼앗고 주를 설치했다. 그로부터 백년이 지나 660년 태종무열왕이 김유신 장군을 비롯한 5만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이천의 남천정에 집결했다. 남천정은 설봉산성이다. 이때만 해도 백제는 신라가 고구려를 칠 것으로 생각했다. 김유신과 5만 병력은 북진하는 것처럼 했다가 이천에서 남하해 탄현을 넘어 진격했다. 김유신은 백제의 계백과 마주쳤다. ‘황산벌전투’다. 계백은 최선을 다했으나 전쟁에 졌고 백제는 멸망했다. 무열왕의 아들 문무왕 역시 남천정을 기반으로 삼국통일을 이룩할 수 있었다.

남천이 이천으로 이름을 바꾼 이는 고려 태조 왕건이다. 임원준은 애련정기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 이천 고을이 고구려때는 남천이었는데 뒤에 신라의 영지가 되어 남매군이라가 이름하고 군주를 두어 다스렸다. 또 황무군으로 고쳐 주위에 있는 여러 현을 관령하였다. 왕태조가 남으로 정벌할 때 대군을 거느리고 군에 이르니 서목이란 이가 인도하여 남천을 무사히 건넜다. 태조가 기뻐하여 지금 이 칭호를 주었다. 또다른 이야기로는 태조가 후백제를 치려할 때 이 고을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점을 치자 이섭대천(利涉大川), 즉 ‘주역’에 자주 나오는 말로 ‘큰물을 많이 건널수록 좋다’는 점괘를 얻었기 때문에 이천이라고 불렀다 한다”
안흥지 가운데 세워진 애련정
애련정에서 본 안흥지와 시가지.
경기도 이천시 안흥지는 유서깊은 저수지다. 이천둑방이라고도 하고 안흥방죽이라고도 한다.우리나라 전형적인 연못 조성형태인 방지, 네모난 못이다. 세조때 축성된 것으로 나와 있으나 역사적 사실이나 지리 등을 따져 볼 때 축성연대가 통일신라까지 거슬러 간다고 이천시는 주장하고 있다. 진흥왕때 남천주를 설치했다는 점, 신라때 후삼국시대때 수만명의 군사들이 주둔할 수 있을 정도로 식량이 풍부했다는 점, 고려시대 대신들이 안흥지 앞 논을 갖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는 점 등등이다.

안흥지는 이천의 구만리들 논과 밭에 물을 댔다. 천하제일의 미질을 자랑하던 자채쌀은 안흥지에서 나왔다. 왕실 진상품이었다. 이 때문에 고려 조선시대 조정대신들이 안흥지 앞 자체 논을 가지는 것을 큰 자랑으로 여겼다고 한다. 구만리 들판의 젖줄이었던 안흥지에 애련정이 있다.1474년(성종 5) 이천부사로 부임한 이세보가 세웠다. 애련정의 이름은 당시 영의정이던 신숙주가 지었다. 애련정은 염계 주돈이의 시 ‘애련설 愛蓮說’에서 따왔다.
애련정 뒤에 심어져 있는 연꽃
물과 뭍에서 크는 초목의 꽃 중에는 사랑스런 것들이 참 많다. 진(晋)나라 도연명은 유독 국화를 좋아했고 당나라 이래로 사람들은 모란을 매우 좋아했다. 나는 오직 연꽃만을 좋아하거늘 그건 진창에서 자라면서도 더러움에 물들지 아니하고 맑은 물결에 씻김에도 요염하지가 않다. 몸속은 뚫리어 통하고 생김은 곧으며 덩굴이나 가지를 갖지 않고 향은 멀리 갈수록 그 맑음을 더한다. 곧고 깨끗하게 서 있어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으나 무례하게 희롱할 수는 없다. 국화에 대하여 말하자면 국화는 은둔자요, 모란은 꽃 중에 부유한 자이며, 연은 군자라. 아! 국화를 사랑하는 이 도잠 이후로 들리는 소리 드문데 나처럼 연을 좋아하는 이 또한 몇이나 있을까? 모란을 사랑하는 이는 분명 많을 테지만/ 주돈이의 ‘애련설’

애련정 편액은 북송시대 성리학자 주돈이의 시 애련설을 따 신숙주가 지었다.
조선선비들은 주돈이를 존경했고 그의 애련설을 사랑했다. 애련설의 ‘향은 멀리갈수록 그 맑음을 더 한다’에서 ‘향원정’, ‘깨끗한 물에 씻겨도 요염하지 않다’에서 ‘탁청정’ 같은 현판이름 지어냈다.애련정에는 왕들의 방문이 잦았다. 중중이 이곳에서 양로연을 베풀었고 숙종과 영조, 정조가 방문한 기록이 남아있다. 여주에 세종대왕의 영릉이 있어서 영릉을 참배하고 돌아가는 길에 들렀다고 한다.

1779년에 정조가 여주행궁에 갔다. 이때 정창성과 애련정에 대해 대화를 나눈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나온다.


“행궁의 뜰 가에 연정이 있는데 이것이 이른바 애련정인 것인가?“

“애련이라는 이름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 되어 국초부터 전해오고 ‘여지승람’에도 실려 있으며 지금도 임원중이 지은 기문이 있습니다”

“애련의 뜻은 주염계의 애련설에서 딴 것인가? 이 정자를 세운 것은 어느 때인가?”

“고을 안의 고로에서 물으니 이세보가 처음 이 정자를 세웠고 신숙주가 애련이라 편액하였다 합니다.”

“풍월정집(월산대군의 문집)에 ‘파서 새 못을 만들고 연도 심으니, 풍류 사랑스럽고 주인 어질다’라 한 것이 있는 데 이 정자를 이른 것인가”

“그렇습니다”

애련정은 세종 10년에 세워졌다가 1998년 복원됐다.
안흥지에는 조선시대 역대 목민관들의 선정비를 한자리에 모아 놓았다.
현재의 애련정은 1998년 복원됐다. 유서 깊은 안흥지와 애련정은 이천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공원으로 변모했다. 서거정과 월산대군 등 애련정을 소재로 쓴 시를 모아 ‘애련정 시비’를 세우고 조선시대 목민관들의 선정비를 호숫가에 모아 시민들의 자긍심을 높였다. 애련정 옆에는 버드나무를 심어 정취를 더했다.

정자는 호수 가운데에 있다. 호수 양쪽 옆에는 커다란 버드나무가 시립하듯이 서 있다. 푸른 호숫물에 비치는 버드나무와 정자가 아름답다. 정자를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호수와 연결하는 다리를 두었다. 호수 정면에는 연꽃을 심어 이곳이 애련정 테마를 잘 부각시키고 있다.
▲ 글·사진 김동완 여행작가

정자 안에는 성종의 형 월산대군이 쓴 시와 서거정 김진상 조위 강경서 등 당대의 문장가들의 시가 걸려 있다. 도심 한가운데 왕이 다녀가고 조선의 대문장가들이 시를 쓴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것은 얼마나 소중한 도시의 자산인가.


그 누가 염계를 뒤이어 애련을 말했는고/ 정자를 명명함이 옛 현인에 꼭 부합되네/ 그대는 응당 덕을 닮아 평생 좋아했겠지/ 나는 또한 속 텅 빈 걸 죽도록 사랑한다오/ 열매가 말처럼 둥글단 말은 이미 들었지만/ 꽃이 피어 배보다 큰 것도 일찍이 보았네/ 다시 재배하는 노력을 열심히 기울이게나/ 풍월 실은 장래에 흥취를 주체 못할 걸세

- 서거정의 시 ‘애련정’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