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역사상 처음 묘호를 받은 임금

무열왕

제29대 태종대왕의 이름은 춘추이며 성은 김씨다. 각간으로 추봉된 문흥대왕 용수(또는 용춘)의 아들인데, 어머니는 진평대왕의 딸인 천명부인이다. 비는 문명황후 문희이니 곧 유신공의 막내누이다. 문희가 춘추공의 부인이 된 데는 유명한 꿈 이야기가 있다.

처음 문희의 언니인 보희가 꿈에 서악에 올라가 오줌을 누는데 그 오줌이 서울에 가득 찼다. 다음날 그 꿈 얘기를 동생 문희에게 하니, 문희가 그 꿈을 비단치마를 주고 샀다. 10일이 지나 김유신이 춘추공과 함께 정월 상오 기일에 자기 집 앞에서 공을 찼다. 이 때 유신이 짐짓 춘추공의 옷을 밟아 고름을 떨어뜨리게 하고 청하여 말하기를, “집에 들어가서 옷고름을 답시다.”고 하니 춘추공은 그 말을 따랐다. 보희가 부끄러워하자, 문희가 옷고름을 달아주었다. 이후 춘추공이 자주 왕래를 하였다. 유신이 그 누이가 임신한 것을 알고, 진노하여 문희를 불태워 죽인다고 온 나라에 말을 퍼뜨렸다. 하루는 선덕여왕이 남산에 거동을 한 틈을 타서 뜰에 나무를 가득 쌓아 놓고 불을 지르니 연기가 일어났다. 여왕이 그것을 바라보고 연기가 나는 까닭을 묻자 좌우에서 시중하는 신하들이 자초지종을 아뢰었다. 때마침 춘추공이 왕을 모시고 앞에 있다가 얼굴색이 크게 변했다. 왕이 말했다.

“이것은 그대의 소행이니 속히 가서 구하도록 하여라.”

춘추공이 임금의 명을 받고 말을 달려 왕명을 전하여 문희를 살리고 혼례를 올렸다.

무열왕 비석 귀부

진덕여왕이 세상을 떠나자 춘추공이 왕위에 올랐다(654년). 나라를 다스린 지 8년째인 용삭 원년(661년)에 세상을 떠나니 그 나이가 59세였고 애공사 동쪽에 장사를 지내고 비를 세웠다. 대왕은 유신공과 함께 신비스러운 꾀와 힘으로 삼국을 통일하여(王與庾信 神謀戮力 一統三韓) 사직에 큰 공을 이룩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묘호(廟號)를 태종(太宗)이라 하였다. 태자 법민과 각간 인문, 각간 문왕, 각간 노저, 지경, 개원 등은 모두 문희가 낳은 아들로 당시에 꿈을 샀던 징조가 여기에 나타난 것이다. 서자는 개지문 급간과 차득 영공, 마득 아간 이라 하는데 딸까지 합하면 다섯 명이다. 왕은 하루에 쌀 서 말과 꿩 아홉 마리를 잡수셨는데(飯米三斗 雄雉九首), 경신년에 백제를 멸한 후에는 점심은 물리고 아침과 저녁만 드셨다. 그래도 하루를 계산하여 보면 쌀이 여섯 말, 술이 여섯 말, 그리고 꿩이 열 마리였다. 성안의 물가는 베 한필에 벼가 30석 또는 60석이었으니 백성들은 성대(聖代)라고 했다. 왕이 태자로 있을 때에 고구려를 치려고 당나라에 청병을 하러 들어갔다. 이때 당의 황제[태종 이세민]는 그의 풍채를 보고 신성(神聖)한 사람이라 하고 기어이 머물러 있게 하여 시위(侍衛)를 삼으려 했으나 극구 사양하고 본국으로 돌아왔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는 진덕왕 2년의 일로서 이 때 당제(唐帝)는 출사(出師)를 약속한 것이다.

김춘추와 김유신의 혼인으로 둘 사이는 물과 물고기 마냥 가까워져서 마침내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다. 김춘추는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 묘호(廟號)를 받은 임금이다. 즉, 태종은 묘호요 무열왕은 시호(諡號)이다. 시호는 전왕(前王)에 대하여 그 공덕을 헤아려 올리는 이름이고 묘호는 사직에 특별히 공적이 있는 임금에 대하여 종묘에 배향할 때 사용하는 이름이다. 조(祖)와 종(宗)은 구별이 되는데, 대체로 개국시조(開國始祖)와 같이 창업이나 중흥의 임금은 조(祖)를, 나라를 덕으로 잘 다스린 임금에게는 종(宗)을 올린다. 후일 태종이란 이름에 대하여 당나라에서 당 태종과 이름과 같다고 고치기를 요구하였으나, 신라는 거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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