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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환 문경지역위원회 위원·문경사투리보존회장
어린 시절과 청춘을 보냈던 곳에 면지(面誌)를 만들고 있다. 전체면적이 75㎡이고, 인구는 대략 3천8백여 명이다. 이곳의 강역이 어떻게 변해 왔는지, 그 역사가 어떠한지는 따로 떼어서 기록한 것이 없으므로 시군지나 도지, 나라의 여러 기록 속에서 떼어내 재구성해야 한다. 그래 봐야 그 분량이 100쪽을 넘길 수 없을 것 같다. 여기서 막막해진다. 다른 면의 면지가 1천 쪽에 이르는데, 겨우 백 쪽이라니. 문헌 속에 존재하는 것들을 아무리 재단해 붙인다 해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

이런 고민 속에 이 일이 차일피일 미루어지다가 나에게 책임이 돌아왔다. 그 과정에서 백가쟁명(百家爭鳴)이요 중구난방(衆口難防)의 방안들이 쏟아졌고 책임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오히려 더 큰 짐이 되었다. 그러다가 그들은 나를 불렀고, 나는 흔쾌히 그 일을 짊어졌다.

나는 그 자리에서 없는 것 찾아 기록하려고 애쓰지 말고 지금 있는 모습을 잘 담아내자고 했다. 역사의 줄기를 찾고 이어 정체성을 세우는 것도 중요하고 기록 없는 과거를 찾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기록의 중심을 현재에 두자. 지금 집집마다 어떻게 살고 있는지 기록해 보자. 있는 산천, 보이는 형상들을 기록하자. 또 100년 뒤에 후손들이 이런 일을 할 때 옛날 기록이 없어 답답해하지 않도록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과 그들의 기억을 기록해 보자.

그랬더니 고민에 빠져 있던 사람들에게 앞이 확 트이는 청량제가 되었다. 이리할까? 저리할까? 뜨거운 감자를 손에 들고 먹지도 못하고 놓지도 못하다가 됐다 싶었던 것이다.

그 후로 일은 일사천리. 편찬위원회를 꾸리고 사무국을 꾸리고, 나는 그곳에 앉아 문헌 수집과 정리 작업을 시작했다. 마침 귀촌한 분 중에 이만한 일은 훤하게 처리할 수 있는 분도 만나 둘이서 재미있게 작업에 나섰다.

그런데 차츰 흥미를 잃게 됐다. 무형의 이 일에 대해 그 값어치를 계량하지 못하는 책임 있는 사람들의 인식이 그 요인이었다. 이런 일의 값어치는 금전으로 환산할 수 없는 흥이 필요하고 온 마을 사람들의 결의가 있어야 한다. 인근 면에서는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 이미 면지를 속속 출간했고, 면민들에게 자긍심을 길러주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일하는 우리들의 처우를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떤데 예산을 들여야 할지 도통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냥 책만 찍어내는 유형의 예산만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니 내가 이걸 이렇게 해 달라, 저걸 저렇게 해 달라 하는 것이 구차해졌다.

인문학은 대부분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만큼 소중하고 값지다. 그 값을 우리는 예의(禮儀)에 따라 왔다. 40여 년 전, 이웃 마을 선비한테 화제(和劑)를 받고 그 값을 차마 드리지 못해 선물로 드렸던 것처럼 돈으로 환산할 수 없었지만, 정성은 있었다.

그러나 산업화를 지나면서 우리는 길 닦고, 집 짓고, 개발하고, 물건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모든 일을 계량화하기 시작했다. 그 속에 인문학의 값은 작아졌다. 그까짓 종이 한 장에 쓴 글쯤으로 치부했다. 그러니 자연히 정성도 달아났다.

그걸 환산한 것이 있다면 문인들의 원고료일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의 원고는 그냥 생각나는 대로 쓸 수 없고 원고를 쓰기 위해 현장을 답사하고, 문헌을 읽고, 해석하고, 재구성하는 등의 보이지 않는 노력이 더 많이 소요된다. 그러려면 모든 걸 팽개치고 2~3명이 전업으로 나서야 일을 해낼 수 있다.

여기에도 전제가 있다. 주변에서 이 일에 적극 참여하겠다는 주민들의 자세가 있어야 하고 이장과 마을 사람들의 열린 마음도 덧붙여야 한다. 그래야 뜻 있는 면지가 될 수 있다.

그런 일을 해야 하는데, 그 값어치가 얼마나 되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예의(禮儀)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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