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png
▲ 최영미 시인.포항대학교 간호학과 겸임교수

‘행복한 가정은 살아가는 모습이 서로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다른 모양으로 괴로워하는 법이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는 이렇게 시작된다. 삶에서 비슷한 점은 무엇이고 다른 모양은 무엇일까, 행복이 비슷하게 드러난다면 불행은 각기 다른 모양으로 나타난다는 말일까, 그렇다면 이렇게 말을 바꾸어보는 것은 어떨까. 행복한 사람은 비슷한 표정을 가지고 있지만 불행한 사람은 그 나머지의 표정으로 가지각색이다.

나의 아버지는 참 완고한 분이셨다. 완고하다는 말이 가진 고상한 품격과는 좀 다른 완고함이었지만 나는 그것도 고상함의 한 갈래라고 생각해왔다. 그것이 우리 집 행복이나 불행의 모양을 판가름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엄마가 쪽진머리를 자르고 파마를 하고 온 날이었다. 하필 가을장마가 시작되던 날이었고 논일을 깔끔하게 마무리하지 못한 아버지는 하늘을 쳐다보며 수없이 혀를 차다 외출하고 온 날이었다. 신식이라는 말을 지나치게 거부하던 아버지를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랬는지 조마조마한 우리 오남매와 달리 엄마는 담담하게 행복해 보였다. 얼큰하게 취한 아버지의 눈에 엄마는 낯선 사람이었다. 왜 남의 방에 들어와 잠을 자느냐고 묻고는 방문을 열어놓은 채 아버지는 돌아누우셨다.

아버지는 막내딸인 나에게조차 애정표현이라고는 하실 줄 모르는 분이셨다. 밥상에서 갈치 뼈를 발라주거나 팽개쳐진 책가방을 들어 책상 옆에 잘 정리해주는 것으로 애정표현이 충분하다 생각하시는 분이셨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미술 시간에 아버지의 손을 그려오라는 숙제를 내주었는데 나는 그때 처음으로 아버지의 손을 자세히 잡아보았다. 별걸 다 한다고 한마디 하고는 억지로 손을 내밀었는데 아버지의 손은 참 컸으나 의외로 하얬고 손가락이 가늘었다. 나도 다른 친구들처럼 아버지 손을 잡고 버스에 오르거나 시장에도 가고 싶다고 말하자 아버지는 내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며 쓰다듬어 주셨는데 나는 아직도 그날 그 손바닥의 느낌을 생생하게 가지고 있다.

나는 옆 사람과 손잡기를 좋아한다. 손가락 마디마디에서 오는 그 굴곡을 내 손끝으로 느끼기를 좋아한다. 손바닥이 거칠면 거친 대로 부드러우면 그런대로 나는 손을 만지는 일이 그 사람 전부를 들여다보는 일처럼 행복하다. 아버지의 손에 대한 그리움이 그런 형태로 나타난 것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악수할 때 전해지는 그 사람의 느낌을 믿는다. 상대방 또한 그렇게 나를 읽어 내리라 믿는 것이다. 그러니까 행복은 어떻게 나타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문제다. 간혹 터치의 정도가 지나쳐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지만 부적절하지 않다면 그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도를 전달할 수 있는 좋은 언어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병상에 있는 환자들에게 어깨 한 번 쓸어 주는 일이, 손 한 번 잡아주는 일이 얼마나 큰 힘이 될 것인지는 경험자가 아니라도 충분히 짐작할 것이다. 굳이 진단을 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인간은 평생 행복을 추구하고 사랑을 갈망하는 병원 밖의 환자다. 톨스토이의 말을 뒤집어보자. 행복은 아주 단순한 손잡기만으로도 올 수 있지만 불행은 손잡지 못한 것에서부터 비롯된다. 그러니까 행복이 가는 길과 불행이 가는 길은 다르지 않다. 불행이 여러 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다면 행복 또한 그럴 것이다. 이 길이 불행할까 두려워하기보다는 얼마나 행복할까로 고민하자. 아시겠지만 불행은 조금 심술궂어서 행복의 장갑을 끼고 손 내밀기도 한다. 그러나 안 속으면 된다. 완고한 내 아버지처럼 방문을 열어놓고 돌아누워 버리면 된다. 오직 손 내미는 당신을 믿으면 된다. 그러면 행복은 그런 당신을 오랫동안 극진히 돌볼 것이다.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최영미 시인.포항대학교 간호학과 겸임교수
김선동 kingofsun@kyongbuk.com

인터넷경북일보 기자입니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