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고종의 산라공격을 모두 막은 명랑법사

당나라 사신에게 사천왕사로 속이려고 만든 망덕사의 옛터. 오른쪽 소나무숲 부근이 망덕사지이다

신미년(辛未; 671)에 당나라는 다시 조헌(趙憲)을 장수로 하여 5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왔으나, 또 전의 비법을 썼더니 배가 전과 같이 침몰되었다. 이때 한림랑(翰林郞) 박문준(朴文俊)은 김인문을 따라 옥중에 있었는데 고종(高宗)이 문준을 불러서 묻는다.

“너희 나라에는 무슨 비법이 있기에 두 번이나 대병(大兵)을 내었는데도 한 명도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느냐?”

문준이 아뢰었다. “배신(陪臣)들은 상국(上國)에 온 지 10여 년이 되었으므로 본국의 일은 알지 못합니다. 다만 멀리서 한 가지 일만을 들었을 뿐입니다. 저희 나라가 상국의 은혜를 두텁게 입어 삼국을 통일하였기에 그 은덕(恩德)을 갚으려고 낭산(狼山) 남쪽에 새로 천왕사(天王寺)를 짓고 황제의 만년 수명(萬年壽命)을 빌면서 법석(法席)을 길이 열었다는 일뿐입니다.” 고종은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이에 예부시랑(禮部侍郞) 낙붕귀(樂鵬龜)를 신라에 사신으로 보내어 그 절을 살펴보도록 했다. 신라왕은 당나라 사신이 온다는 사실을 먼저 알고 이 절을 사신에게 보여서는 안 될 것이라고 하여 그 남쪽에 따로 새 절을 지어 놓고 기다렸다. 사신이 와서 청한다. “먼저 황제의 수(壽)를 비는 천왕사에 가서 분향(焚香)하겠습니다.” 이에 새로 지은 절로 그를 안내하자 그 사신은 절 문 앞에 서서, “이것은 사천왕사(四天王寺)가 아니고, 망덕요산(望德遙山)의 절이군요.”하고는 끝내 들어가지 않았다.

국인(國人)들이 금 1,000냥을 주었더니 그는 본국에 돌아가서 아뢰기를, “신라에서는 천왕사(天王寺)를 지어 놓고 황제의 수(壽)를 축원할 뿐이었습니다.”했다. 이때 당나라 사신의 말에 의해 그 절을 망덕사(望德寺)라고 했다.

우주에 붓다가 가득함을 보여주는 밀교의 다라니

이상, 당 고종의 신라공격을 모두 신력(神力)으로 막은 명랑법사의 비법과 그것을 시전한 사천왕사를 이야기하고 있다. 명랑법사의 문두루법이란 ‘무드라(mudra)’의 한역인데, 인계(印契) 또는 수인(手印)을 뜻한다. 법당을 들어가 보면 부처님이 손가락을 맺어 여러가지 모습을 보이는데 그것이 수인(手印)이요, 무드라이다. 문두루법은 손으로 어떤 계인(契印)을 맺으면서 『관정경』, 『인왕호국경』 등의 다라니[주문]와 경문을 외우면서 행하는 밀교의 비법이다. 밀교(密敎)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인 현교(顯敎)에 대응하는 개념으로서, 중생의 요구와 시절의 인연으로 나타난 석가모니는 화신불로서 비록 역사적인 실재인물이나, 불생불멸하고 무색무취(無色無臭)한 진리의 본체인 진정한 부처가 아니라 한다. 진리의 몸 그대로, 우주의 본체가 되는 부처님을 법신불이라 하는데 그 명호가 비로자나불이다. ‘비로자나’는 광명이 우주법계를 두루 비친다는 뜻으로 광명변조(光明遍照)라 한다.

밀교의 전래는 인도의 유명한 승려인 용수(龍樹)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남인도의 철탑에 들어가 밀교를 배웠다하며 그 법을 용지(龍智)에게 전한다. 용지보살은 700세를 살아도 얼굴빛이 30세나 40세로 보였다 하며, 선무외삼장과 금강지에게 밀교를 전했다. 선무외는 중국으로 들어가서 대일경과 금강정경을 역출하였고 금강지는 스리랑카와 스마트라를 거쳐 중국에 도달하여 밀교를 폈다. 한국의 밀교전통은 신라 중기부터 성행했는데, 밀본(密本)·안홍(安弘 또는 安含)·명랑(明朗)·혜통(惠通) 등의 고승을 배출하였다. 명랑법사는 자장율사의 생질로서 632년(선덕여왕 1) 법을 구하러 당나라에 갔다가 4년 후 돌아올 때에 용왕의 청으로 용궁에 들어가 비법을 전해 받았다는 전설이 있다. 신라 신인종(神印宗)의 개조로 그 후손으로 안혜(安惠)·낭융(朗融)·광학(廣學)·대연(大緣) 등 4대덕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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