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일만에서 일궈낸 기적의 힘으로 바다 위에 제철소를 짓다

광양만에 위용을 드러낸 1고로.

고도성장기의 급증하는 국내 철강수요를 감당키 위해 정부가 추진한 제2제철 실수요자로 선정된 포스코는 영일만의 신화를 광양만으로 이어가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제2제철 실수요자로 지정되었지만 그 입지를 두고는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1) 제2제철소 입지, 9년 만에 가로림만→아산만→광양만으로.

광양제철소 부지를 시찰하는 박태준회장과 국회 건설분과위원회 의원들.
제2제철 입지는 1972년부터 시작돼 장장 9년 동안 논쟁의 중심에 있었다.

경제적 효율성을 우선으로 한 수도권 입지와 비수도권 균형발전의 입지시각이 팽팽히 맞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제2제철 입지는 낙동강 하류로 결정되었다가 다시 수도권으로 이동하였고 몇 차례 재확정을 거쳐 다시 남해안 광양만으로 최종 낙점되기에 이른다.

이는 중화학공업화 초기 추구되었던 지역균형발전논리가 점차 효율성 우선의 논리로 전환되었다가 다시 1979년 박정희 대통령 死後 제기된 소외지역 균형발전 논리가 국가 주요 정책 결정 변화에 반영된 영향도 있었다.

제2제철 입지문제는 실수요자선정과 궤를 같이하여 오랫동안 엎치락뒤치락 논란을 거듭했다. 1972년 2월 당시 유력재력가인 호남정유의 서정귀 사장이 제2제철을 삼천포에 건설하려고 구상했지만 이는 구상만으로 머물렀을 뿐 더 이상 확대되지는 않았다.

그 후 정부에서 제 2제철 건설을 본격적으로 추진한 1973년 3월, KIST는 광양만과 낙동강하구 지역을 입지로 추천한다. 한편 건설부는 당시 후보지로 물망에 올랐던 아산만, 광양만, 낙동강 하구 동안과 서안에 대해 예비조사를 실시했으며, 외국계 용역사 UEC(U.S.S. Engineerss and Consultant)는 1974년 6월 아산만을 입지로 추천했다.

이때 광양은 연약지반이라는 문제점이 있는 데다 석유화학단지로 검토되고 있는 곳이어서 일단 제외되고, 건설부도 이전부터 아산만을 입지로 구상하여 이미 1974년 2월 아산을 기준지가 고시지역으로 공고해 놓아 별다른 논란 없이 아산이 제2제철 입지로 굳어가는 듯했다.

그러나 정부주도의 제2제철 건설안이 무산되고 1977년부터 민간주도의 제2제철 건설안이 나왔을 때 현대그룹 측은 영덕군 영해를 적지로 제시했다. 현대는 제철소건설을 이미 염두에 두고 영덕에 아산병원을 짓고 대규모 부지를 매입해 놓는 등 일찌감치 사전 준비를 해 건설부가 주장하는 아산만과 경합하게 되었다.

이후 건설부가 입지조사용역을 의뢰한 결과, 영해의 경우 부지조성비용은 적게 드나 지역이 협소하여 연관단지 등을 조성할 수 없는 단점이 있어 아산만이 유리한 것으로 조사되자 현대는 대안으로 가로림만을 후보지로 내세운다.

이때 포항제철은 1978년 6월 입지 가능 지역으로 영해와 아산을 비교검토 한 끝에 아산이 유리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같은 해 10월 17일에는 경제기획원에서 아산만을 제1후보지로 하되 실수요자가 2개월 이내에 다른 후보지를 제시하면 이를 검토하여 최종 확정하기로 결정한다. 이 상황에서 10월 21일 박 대통령은 갑자기 박태준 사장을 불러 함께 헬기로 가로림만을 돌아봤으며 이때 청와대 경제팀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제2가로림만이 입지 후보로 추가되었다.

마침내 1978년 10월, 제2제철 실수요자가 공식 발표되자 입지선정은 새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포항제철은 제1 가로림만, 제2 가로림만, 아산만 세 곳의 지질조사 및 해상조사를 시행하고 외국 전문기관에 입지 타당성 조사를 의뢰했다. 결과는 일본의 2개 회사는 제2가로림만을, NEDECO는 아산만을 추천해 혼미를 거듭했다. 결과를 검토한 포항제철은 박 대통령에게 제2가로림만을 건의한다. 그러나 이때 영일만을 포항제철소 입지로 강력히 추천했던 건설부의 유호문 산업입지국장이 “가로림만은 연약지반으로 지반개량에 막대한 비용이 소요된다.”며 강력히 반대했다. 이에 따라 1979년 7월 24일 박정희 대통령 주재로 열린 청와대 회의에서 제2공장 입지는 아산만으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포항제철이 1980년 1월 초까지 아산만의 지질 기초 조사를 실시한 결과 제철소 입지로 문제가 많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간만의 차이가 심해 25만 톤급 선박이 출입하려면 규모의 갑문 건설이 필요한데 갑문을 건설하려면 기술도 문제가 되고, 엄청난 자금조달도 장애요소가 될 수 있었다.

이와같은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제2제철 사업자인 포항제철은 침체된 국내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서라도 제2공장 건설을 조속히 시작해야 한다고 판단, 관계기관과 다각적인 협의를 계속하는 한편 독자적으로 광양만에 대한 조사계획을 수립하고 1979년 12월에는 유상부 건설부장을 반장으로 하는 조사반을 구성, 지질조사를 시작하고 국제적인 공신력을 확보하기 위해 연약지반문제의 세계적인 권위기관인 일본어스리서치(Earth Research)연구소의 검토를 받아 광양만이 제철소입지로 매우 이상적이란 평가를 받아낸다.
2제철 광양만 확정 언론기사(1981년 11월)
제2제철 입지결정공문.
많은 시간이 흐른 후 건설부는 1981년 11월 4일 청와대 관련 회의에서 아산만을 제철소입지로 건의하는 보고안을 확정했으며, 포항제철은 광양만을 건의하기로 했다.

결론은 의외로 싱겁게 끝났다.
최종확정된 광양제철소 배치도
박태준 회장과 정명식 부사장이 참석한 이날 청와대 보고회에서 전두환 대통령은 이미 포항제철소를 성공적으로 건설한 경험을 존중하여 제2제철 입지를 광양으로 최종 확정했다.
14제 2제철 실수요자를 보도한 신문기사.
제2제철 유치를 환영하는 광양주민들.
이날 전두환 대통령은 “포항제철은 연약지반에 대한 기술상의 어려움을 책임지고 해결 해야 할 것 이며, 1공기를 준수하고, 해상오염을 최대한 방지할 것”을 강조했다. 이로써 1972년부터 각축을 벌여왔던 제2제철의 입지선정 드라마는 9년 만에 광양만으로 매듭지어졌다.

광양제철소건설사무소 발대식(1981년)

2)바다 위에 제철소를 지어라. 그리고 1사 2소 체제의 그림완성.


정부가 1981년 11월 4일 광양만을 포스코의 제2공장 입지로 확정하자 선발대 48명을 현지에 파견한다.

금호도에 설치되었던 건설사무소
대원들은 금호도안의 1982년 1월 4일 시무식을 갖고 본격적인 업무를 시작하지만 제철소의 위치가 확정되기까지는 상당 기간 연구와 조사작업이 뒤따랐다.
1983년 광양제철소 개소식
선발요원들은 열악한 주변 여건과 60년 만에 몰아닥친 최악의 강추위로 바다 위에서 벌이는 시추작업에 악전고투를 거듭했다. 하지만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기어이 성사시키고 말겠다는 포철 특유의 정신으로 지질조사업무를 완수해 부지조성공사의 초석을 마련한다.
연약지반 개량을 위한 파일 항타 모습,
바다 위에 제철소를 짓는 작업은 쉽지 않았지만 모래벌 영일만에서 일궈낸 기적의 힘이 광양에서도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
광양제철소 호안공사 착공 (1982년 2월)
13.6km의 거대한 호안을 쌓고, 그 안에 섬진강에서 흘러 내려온 퇴적토를 채워 넣었다. 부지 구역 내의 13개 섬을 발파하고 인근 해역의 오염을 방지하기 위해 수중커튼을 설치하는가 하면, 호안의 철저한 점검을 위해 수중감사까지 실시했다. 이렇게 하여 조성된 부지는 주택단지까지 포함해 1천 710만㎡(510만 평). 준설토의 양만 해도 여의도 63빌딩 140동에 맞먹는 물량이었다.
포항 본사 신사옥 준공(1987년)
1987년 5월 7일. 조강 연산 270만 톤 규모의 광양 1기 설비가 종합 준공되었다. 마침 포항에서는 본사 신사옥이 준공됨으로써, 포스코는 포항제철소와 광양제철소를 잇는 <1사 2소 체제>에 들어갔다. 모든 공정을 자동화하고 전산화한 21세기형 제철소로 설계되었으며 두 제철소의 제품라인과 물류시스템이 구축되었다.

3) 유상부 전 회장이 지켜 본 제2제철소 입지.

1981년 11월 광양만이 제2제철소 건설 입지로 최종 확정된 후 유상부 당시 건설부장(앞줄 오른쪽)이 고준식 사장, 정명식 부사장과 함께 광양만 부지를 둘러보고 있다.
유상부 전 포스코 회장은 2제철 입지가 가로림만→아산만→광양만으로 바뀌는 현장에 있었다.

1979년 2월, 일본 출장 중이던 유상부 전 회장(당시 건설부장)은 박태준 사장으로부터 급히 들어오라는 전화를 받는다.

유부장은 급거 귀국하자마자 충남 서산의 공군부대 안에 차려진 제2제철 입지조사반으로 달려갔다. 당시 건설부는 제2제철 입지를 아산만으로 확정했지만, 박 대통령이 가로림만 언급한 것이 계기가 되어 조사가 진행 중이었다.

간조 시 가로림만은 광활한 개펄이었다. 가용 수단을 총동원해서 조사를 진행해보니 제철소 입지로는 불가했다. 이 문제를 두고 유부장을 비롯 관련부서 간부들은 2주일간 퇴근도 못 하고 청송대에서 토론을 벌여 대통령에 사실대로 ‘아산만이 낫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건설부가 내세운 아산만도 막상 현지조사에 들어가 보니 입구에 2.2㎞에 이르는 방조제를 축조해야 하고 25만 톤급 선박이 들어 올 거대한 갑문을 건설해야 했다. 건설부가 예측한 예산의 4배 이상을 투입해야 하고 고로가 들어설 위치에 연약한 편암층(片巖層)이 발견돼 부적절했다. 결국 박태준 사장으로부터 ‘광양은 어떻겠나?’ 라는 지시를 받은 유 부장은 김 장수로 위장해서 비밀리에 광양만 조사에 들어가 배를 타고 며칠 동안 바다를 떠다녔다.

그러던 중 1979년 10월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후 국보위에서 제2제철 입지는 아산만임을 전화로 통보해왔다. 사전 조사를 통해 아산만이 부적절하다는 사실을 안 유부장은 ‘전두환 국보위 위원장 전 상서’라는 제목의 편지에 광양과 아산을 비교한 6장의 보고서를 첨부하여 조말수 전 사장과 함께 이학봉 서울지역 보안대장 자택을 찾아갔다.

유 전 회장은 박태준 사장에게 이 사실을 사후 보고했고 그날 오후 바로 국보위로부터 광양과 아산을 상세히 비교 검토해 보고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거듭된 회의와 토론을 거치면서 건설부는 완강하게 아산을 주장했고, 포스코는 광양을 주장했다. 양측 주장이 팽팽히 맞서 있는 가운데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각종 정보보고를 통해 포스코의 주장이 옳다고 판단, 광양으로 하라는 최종 지시를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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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한웅 작가·콘텐츠연구소 상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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