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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성일 편집부국장
언젠가부터 ‘남북 평화’ 분위기가 주위를 맴돌고 있다.

‘남북 평화’가 오래전부터 얘기됐지만 됐지만 이번에는 예전과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숨이 막힐 듯 맹렬하게 우리의 삶을 위협하던 ‘폭염’도 다가오는 가을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이처럼 사계절이 뚜렷하듯, 한반도 역사에도 계절이 있다면 ‘핵무장’이라는 폭염을 지나 ‘남북 평화’라는 결실의 계절을 맞이할 수 있으리라.

결실은 폭염의 여름이 있었기에 가능하다. 북한의 ‘비핵화’라는 대전제가 있었기에 남과 북, 그리고 미국의 한반도 평화협상 현실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남북통일’도 가능한 꿈이었으면 한다.

한민족뿐만 아니라 인류의 역사는 ‘분열’과 ‘통일’의 연속이었다. ‘침략’과 ‘독립’이기도 했다.

한반도 통일의 역사는 신라의 삼국통일, 즉 ‘삼한일통’(三韓一統)이 최초이다.

당시 삼국은 같은 민족이 아닌 타민족으로 인식한 적대국이었다.

신라의 삼한 일통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그때 신라는 반도 동남방 변방의 조그마한 국가로 그리 존재감이 없었을 것이다. 대륙의 웅혼한 기상을 가진 고구려와 일본 중국과 왕래하며 번성했던 백제와 비교하면 신라는 보잘 것 없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신라의 삼한 일통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다.

변방에서 국제정세를 파악하며 때를 기다린 결과였다. 왜구의 침략에 시달렸지만, 고구려와 백제보다는 외환이 적은 탓에 내실을 다지는 내공을 기를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다른 나라보다 늦게 받아들인 불교가 국교가 되면서 불교의 이상향인 불국토 건설이 삼한 일통까지 이어졌다.

삼국이 통일된 뒤, 삼한(三韓)인을 정신적으로 통합하기 위해 신라가 가장 고심했던 것은 통일된 종교적 체계를 갖추는 것이었다. 이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들이 ‘원효’와 ‘의상’이다.

원효는 불교 종파의 다양성을 인정하면서도 모든 것이 오직 한마음에서 비롯된다는 ‘一心(일심)’ 사상을 바탕으로 더 높은 차원의 통합을 원했다.

의상은 화엄학을 바탕으로 하나가 전체이며 전체가 하나라는 ‘一卽多 多卽一(일즉다 다즉일)’의 교리를 펼쳤는데, 이는 대립하는 다양한 종파가 결국 하나의 진리로 통한다는 뜻이었다. 원효와 의상의 이러한 노력으로 고구려, 백제, 나아가 중국에서 들어온 다양한 종파가 ‘신라 불교’라는 하나의 그릇에 담길 수 있었다.

통일되기 전, 신라의 왕은 ‘삼국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강력한 지도자’여야 했다. 그래서 진흥왕은 자기 자신을 ‘전륜성왕(속세를 통일해 불법으로 통치할 이상적 왕자)’으로 칭하고 화랑도를 정비해 그들을 ‘미륵불’의 화신이라 했으며, 자기 아들들을 금륜(후에 진지왕), 동륜(후에 진평왕)으로 불렀다. 불교는 이런 왕을 보필해 삼한일통을 이루기 위한 정신적 토대로 기능했다.

이처럼 최근 한반도에 불어오는 평화 기운을 북방 경협을 넘어 통일로 치닫기까지는 우리 스스로 내공을 길러야 한다. 단순히 먹고사는 북방 경협 차원을 넘어 한민족이 하나가 돼 인류를 위해 헌신하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북한을 아우를 수 있는 이념체계와 그를 통합할 수 있는 철학적 담론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

자신이 어떠한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내공(內功 )을 가져야 국가와 민족이 국제사회의 강력한 태풍에도 무너지지 않는 대오를 형성할 수 있다.

‘분단’에서 ‘통일’로 가는 ‘내공’을 신라의 삼한일통에서 배워야 한다.

곽성일 편집부국장
곽성일 기자 kwak@kyongbuk.com

행정사회부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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