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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환 문경지역위원회 위원·문경사투리보존회장
우리나라 전국 각지 길가나 빈터, 야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미국자리공이라는 한해살이풀 한 포기가 집 마당에 흐드러졌다. 붉은빛을 띤 줄기가 엄지손가락만큼 굵고, 참깻잎 같은 모양의 잎도 들깻잎만 하다. 거기에 송이송이 하얀 꽃을 피우고, 꽃 진자리에는 콩 반만큼 크기의 열매가 까맣게 맺혔다. 한해살이가 다 돼 가는 중이다.

처음 이 풀이 난 지난 봄 4월경에 시멘트 마당 틈새에 났기로 어떻게 그 많고 많은 터 중에 여기까지 났느냐 여기며 청소를 하면서도 뽑지 않고 그냥 두었던 풀이다. 그랬더니 이 풀이 내 마음을 아는지 수십 년 만에 찾아 온 덥고 메마른 지난 여름에도 난실 난실 춤을 추듯이 자랐다. 하도 신통해 들며 날며 쓰다듬어 주기를 수십 번. 이젠 뜨락에까지 팔을 뻗어 내 신발과 나란히 잠을 자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면서 차츰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는데, 처음 푸르기만 하더니 지금은 줄기와 잎, 열매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확실하게 드러냈다.

미국자리공이라는 이름을 안 것은 며칠 전이었다. 하도 신통해 출근길에 사진을 찍어 스마트폰 한 어플에 올렸더니 금방 미국자리공이라는 처음 듣는 이름을 알게 됐다. 그래서 백과사전을 뒤졌더니, 1950년대 6·25 때 미국에서 들어온 귀화 식물이라고 검색됐다. 뿌리가 굵고 비대한데 자리공의 뿌리는 흰색이고 미국자리공의 뿌리는 노란색을 띠며, 약재로 쓰인다고 했다. 열매와 뿌리에 독성을 지녀 다른 식물의 성장을 방해하며, 동물이 열매를 따 먹으면 죽기도 하고, 열매는 적색 염료, 간혹 임시 잉크로 대용하기도 하는데, 약으로 쓸 때는 탕으로 하고 열매는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6·25, 미국, 귀화식물 등에 생각이 머물다가 외사촌 누나가 생각났다. 유일한 외사촌이기도 하다. 6·25 유복녀다. 어머니 바로 밑에 동생이었던 1928년생 외삼촌께서 1950년 6·25 전후에 모전의 경주이씨와 결혼을 하고, 누나를 가진 생태에서 참전했다. 그 누나는 그것도 모르고 1952년 10월 아버지 안 계신 집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외삼촌은 꿈에도 그리던 딸과 아내와 어머니, 누나, 동생을 다시는 보지 못하고, 휴전 직전인 1953년 7월 강원도 금화지구 전투에서 전사하셨다.

그러자 이팔청춘 외숙모도 개가하시게 됐고, 외할머니와 누나 단둘이 초가삼간 오두막집에서 살게 됐다. 다행히 외삼촌이 전사하시면서 나오는 연금이 있어 둘의 기초생활은 되었다.

문제는 외할머니가 돌아가시자 딸인 누나 앞으로는 연금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당시 호적에 대한 체제가 지금 같지 않아서 편의에 따라 호적을 정리한 탓이었다. 외삼촌부터가 그랬다. 혼인신고가 되지 않았다. 그러니 딸이 있을 리 없었다. 누나는 외삼촌의 가장 가까운 친척인 사촌 형에게 호적을 얹을 수밖에 없었다. 호적상 누나는 미국자리공이었다.

그 좋은 터를 다 마다하고 우리 집 시멘트 마당 틈새에 끼어 자란 미국자리공. 어릴 때는 이름조차 알 길 없이 잘 자랐는데, 귀화식물로 알고 보니 나타난 낯 설움. 누나와 운명이 무척 닮았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이 마을 150가구 누구라도 누나가 외삼촌의 딸로 유복자란 사실을 다 증언하고 있어도 호적으로 누나는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말할 수 없었다. 문서로 말해야 하는 나라에서는 그 딱한 사정을 어찌할 도리가 더더욱 없었다.

그런데 미국자리공의 정체를 백과사전이 증언하듯, 누나의 정체도 학교에서 명확하게 기록해 둔 것을 발견했다. 초등학교 학적부에 아버지, 어머니 이름과 생년월일이 또박또박 기록됐던 것이다.

이를 보면서 참으로 우리 선생님들의 관심과 관찰이 위대하다는 것을 느꼈다. 백과사전에 식물들의 뿌리, 줄기, 잎 모양을 하나하나 기록하고, 그 성분을 일일이 기록해 누가 보아도 그 정체를 확연히 알 수 있게 했듯이, 선생님들이 학적부에 편의에 따라 기록된 호적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있는 사실대로 기록했다는 것. 그런 위대한 관찰과 관심이 오늘의 이 땅에서 떳떳하게 국가보훈대상자로 누나를 살아가게 한 것이다.

누군가의 관심과 관찰은 이렇게 한 사람을 살리게 한 것이다. 그 관심과 관찰은 비단 사람에게만 해당하지 않으리라. 6·25 때 이역만리 따라와 낯선 이 땅에 정착한 미국자리공도 관심과 관찰의 힘으로 정착한 것은 아닌지. 시멘트 마당 틈새에서 이 밤을 흐드러지게 기다리는 미국자리공. 누나의 생과 많이 닮은 이 한해살이풀에 대하여 더욱 따스한 관심과 관찰을 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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