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택균 경주지역위원회 위원·동국대 경주캠퍼스 교수
“5분만 더 일찍 출발할 걸…” 운전대를 차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지난여름 일이다. 토요일 오후, 도로는 이미 경주를 찾아온 관광객들의 차들로 가득했고 그 움직임은 거북이 마냥 느리기만 했다. 약속 시간에 늦을까 하는 조바심이 점점 커졌고 결국 골목으로 차를 돌렸다.

골목은 길가에 주차된 차들 사이로 겨우 한 대가 아슬아슬하게 지나갈 공간이 있어 속도를 낼 수는 없었지만 꽉 막힌 도로보다 상황이 나았다.

비좁은 골목길을 곡예 하듯 헤쳐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맞은편에서 오는 차와 마주쳤다. 길은 내가 가는 방향으로 일방통행이었으므로 상대차가 비켜주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상대 차는 묵묵부답으로 미동도 하지 않았고 나는 점점 치미는 짜증을 억누르며 차 문을 열었다.

우리는 많은 사람과 대화를 하며 살아간다. 그 대화 안에서 각자의 생각과 희로애락의 감정을 주고받는다. 일찍이 의사소통 철학자 부버(Buber, M.)는 인간의 대화를 ‘나와 너’과 ‘나와 그것’의 소통으로 나눈 바 있다.

전자는 상대를 하나의 고유한 인간으로 인식하고 하는 대화로 주로 가족, 친한 친구나 연인 사이에서의 대화가 여기에 속한다.

한편, 후자는 상대를 기계의 부속품과 같이 대체 가능한 존재로 인식하는 대화로 은행, 편의점, 가게 등에서 직원과의 일상적인 대화가 여기에 속한다. ‘나와 너’의 대화에서는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가 중요한 데 반해, ‘나와 그것’의 대화에서는 상대의 사회적 역할이 중요해진다.

최근 우리 사회는 많은 갈등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심지어 사소한 갈등조차 원만히 해결하지 못해 법정 싸움으로 번지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물론 사람은 저마다 각자 서로 다른 경험과 생각을 가지기 때문에 서로 의견과 입장이 달라 갈등이 발생하는 것은 날씨가 변화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서로 충돌할 때마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는 싸움과 경쟁으로 귀결되는 곳은 결코 구성원이 행복한 사회가 될 수 없다. 홉스(Hobbes, T.)의 말처럼 그러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만연한 사회에서 “인간의 삶은 고독하고, 가난하고, 불결하고, 잔인하며, 짧을” 것이다.

갈등을 원만하게 해결하기 위해서는 양보와 타협, 협력의 대화가 필요하다. 우리 선조들은 상대의 처지와 입장에서 생각해 볼 것을 뜻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 ‘기기기익(己飢己溺)’등의 지혜를 강조하였다. 하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다.

전문화와 분업화가 특징인 현대 사회로 이행하면서 우리는 각자 맡은 사회적 역할에 초점을 맞추어 소통하는 것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고객과 직원, 사장과 종업원 등의 사회적 정체성에 입각한 대화에서 상대가 직원 A인지 직원 B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는다. 이러한 경우 주체는 고유한 인간에서 얼마든지 대체 가능한 역할 수행자로 갈음된다. 사회적 부속품과 타협, 협력을 기대하기는 어렵기에 갈등은 승자와 패자를 나누는 대결로 귀착하게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순리와도 같다.

“죄송합니다. 초행길이라서 그만 헷갈렸습니다. 근데 제가 운전에 서툴러서요…” 상대 차량의 운전자가 뒤늦게 한걸음에 달려와 90도로 몸을 굽혀 사과를 하며 건넨 말이었다.

사과하는 운전자의 어깨너머로 차 안에 아기 엄마의 걱정스런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주말에 한껏 마음이 부풀어 경주 나들이에 나선 가족이었으리라. 자연스럽게 비슷한 나의 지난 경험이 떠올랐다. 아울러 논리적인 근거를 들어 상대의 잘잘못을 따져 질책해야겠다는 마음은 어느새 눈 녹듯 사라지고 없었다.

갈등을 원만히 해결하기 위해 우리 선조들 강조했던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첫 출발, 그것은 나와 삶을 공유하지 않은 타인을 나와 같은 온전한 사람으로 보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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