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철소의 모든 설비 주무르며 제관 외길 인생

▲ 포스코 기성1호 연봉학
포스코에서 기성(技聖)은 장인(匠人)의 표상이자 기술의 상징이다

포스코는 1975년9월, 인력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기능인력이 기능숙달에 정진하는 기풍을 조성하고, 이를 통해 품질과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기성제도를 도입했다. 기성은 해당분야 최고기능보유자로 기술개발능력과 생산성 향상에 구체적인 공로가 있고, 설비관리능력이 탁월한 근속 15년, 연령 45세 이상의 직원에서 선발된다.

기성의 자격은 퇴직이나 징계처분에 의하지 않고는 소멸 되지않고, 동일분야에 계속 종사하도록 하며, 정년연장등 처우와 신분을 보장했다.

포스코는 1976년 12월, 첫 기성보를 선발한데 이어 1984년에 기성을 임명했는데 그 주인공이 연봉학 初代 기성이다.

‘포스코 기술의 전설’인 그는 지금은 퇴직한 한국 철강업계의 원로이지만 포항제철소 1기 설비공사가 진행 중이던 1971년 8월에 입사해 고로에서부터 제강, 압연, 기타 부대설비에 이르기까지 제철소의 모든 설비를 주무르며 제관(製罐) 외길 인생을 걸어왔다.

연봉학 기성은 열악한 기술·장비의 한계를 딛고 100톤 전로등 ‘제철설비 국산화’에 기여했으며 1991년 제 4고로 설비사고 해결의 일등공신.

또 그가 과거 ‘포스코신문’과 인터뷰에서 밝힌 일화에 따르면 당시 포스코 초기멤버들의 기술자립 의지가 얼마나 강렬했음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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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스코 기성 1호 연봉학.

연 기성은 입사 3개월 만인 1971년11월에 일본 야하다제철소로 연수를 떠났는데 그곳 야하다제철소 각 사무실에는 포스코가 간절히 필요로 하는 자료가 즐비했다. 그의 눈에 열처리 시간과 경과가 정확히 기록된 ‘제철설비 제작 표준시간 마스터 테이블’이 들어왔다. 그러나 일본인 기술자들은 자료들을 보는 것까지는 허용했지만 기록이나 복사는 불허했다. 안타까웠다.

같이 간 동료 중에는 자료를 촬영, 현상하다가 들켜서 모두 빼앗기기도 했다.

사무실 밖으로 가지고 나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각 페이지를 촬영해서 제철소 인근 현상소에 맡겼는데, 그 현상소에서 제철소에 알려 결국 필름까지 다 뺏기고 선금으로 지급한 현상료만 되돌려 받았다.

과거 인터뷰에서 연봉학씨가 대한민국 젊은세대에게 꼭 전해주고 싶다고 한 말이 있다. “기술에는 두 가지가 있다. 장인적(匠人的) 기술과 학문적 기술인데 학문적 기술은 장인적 기술과 어울려서 현장성을 확보하게 되고, 장인적 기술은 학문적 기술의 도움을 받아 기술의 객관성, 기술자산의 사회적 공유를 이룰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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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봉학 기성 등 포스코가 자체 기술로 개발한 대형 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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