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석규 제5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소설 동상

김진혁작
주희는 밖이 아닌 안을 택했다. 히키코모리 같은 생활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생각보다 외롭지도 답답하지도 않았다. 지난주에 누군가 숨어 있을 만한 커다란 옷장을 버렸다. 전면 거울과 소파도 치웠다. TV, 화장대, 책장, 인형, 액자, 오디오를 작은 방으로 몰아넣었다. 하얀색 벽지로 새로 도배를 했다. 천장 등을 가장 밝은 LED로 교체했다. 무겁고 두꺼운 회색 이중 커튼을 베란다 창문에 달았다. 바닥을 종일 쓸고 닦았다. 텅 빈 거실은 이제 안전해졌다. 거실에 머무는 동안, 두려움은 물에 빠트린 수면제처럼 흐리터분하게 사라졌다. 주희의 하루는 거실에서 시작해 거실에서 끝났다.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은 현관문을 열었다. 오늘처럼 분리수거하는 날이 유일한 바깥나들이 시간이다. 플라스틱 도시락 통을 꾹꾹 눌러 담은 자루 세 개를 문 앞에 옮겨다 놓았다. 다, 다, 다, 다. 배달 오토바이 소리가 경박하게 들려왔다. 커튼을 조금 젖혀 밖을 살폈다. 배달원이 스쿠터를 세웠다. 그는 시동을 켜 놓은 채 배달 물건을 들고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핸드폰 케이스 만드는 가게에서 3개월. 팔찌나 귀걸이 같은 액세서리 만들기 6개월. 청바지 리포밍 5개월. 구제 핸드백 수선 보조 일을 또 몇 개월. 주희는 그밖에 말로 설명하기도 힘든 여러 직업을 거쳤다. 그래도 공통점은 있었다. 헌 것을 새롭게 바꾼다는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모든 것을 가만 둔적이 없었다. 지우고 그리고 오려붙이고 짜깁기하고 변경했다. 청바지가 그랬고 운동화가 그랬다. 장갑과 모자가 그랬다. 심지어 대학 시절 쓰던 스쿠터 헬멧도 리폼을 했다. 흔적을 지우고 새 옷을 입히면 사물은 순수했던 상태로 되돌아갔다.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주희에게 리폼이란 성스러운 의식과 비슷했다.

먹다 남긴 자투리 김밥 꽁지 같은 경력은 이제 충분해. 주희는 모조 보석을 플라스틱 머리핀에 붙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랫동안 할 수 있는 직업이 무엇일까, 작년 말부터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래서 찾은 것이 ‘간편식 콜라보레이터’였다. 그게 뭐하는 거예요? 블로그에 적힌 주희의 직업명을 본 사람들의 첫 반응은 항상 똑같았다. 질문에 이렇게 댓글을 달았다. 편의점 도시락을 리포밍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동안 자신이 리포밍 한 도시락 사진과 레시피가 적힌 링크 주소를 알려주었다. 새로운 직업의 탄생은 작은 사건에서였다. 어느 날 GS 편의점의 3천9백 원짜리 도시락을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다가 문득 홈쇼핑에서 판매하는 남해 젓갈을 보았다. 쇼 호스트는 이쑤시개에 큼지막한 젓갈을 찍어 카메라에 가까이 댔다. 반들반들 윤이 나고 고불고불한 낙지 젓갈이 화면에 가득 찼다. 이 밋밋한 쌀밥 위에 저걸 얹어 먹으면 꽤나 어울리련만. 도시락 재창조를 위한 아이디어는 그렇게 시작됐다.

간편식 콜라보레이팅의 첫 단계는 시중에서 판매하는 도시락의 장단점을 꼼꼼히 살피는 것부터다. 제품별로 특유의 맛과 향이 있기 때문에 밥과 반찬의 분석은 필수다. 기존의 반찬들을 이 도시락에서 저 도시락으로 단순히 옮길 때도 있고 서로 다른 양념을 적당히 섞어 새로운 맛을 창조할 때도 있다. 가끔은 남은 재료로 도시락과 어울릴 만한 밑반찬을 직접 만들기도 한다. 채 썬 당근을 볶고, 브로콜리를 삶고, 시금치를 데치고, 무를 조린 덕에 주희는 온갖 식재료를 접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쓰지 않았다. 분홍색 소시지. 그것은 음식이 아니다. 술 취한 사람의 피부 색깔 같은, 무름과 단단함을 한 몸에 지닌, 비닐 막을 뒤집어씌운 길쭉하고 터질 듯한, 혐오스러운 모습의 옛날 소시지는 결코 먹을 만한 것이 아니다.

도시락 명을 짓는데도 신중을 기해야 한다. 해장국 도시락, 매운 갈비 도시락 같은 것은 흔하고 고루하다. 이름만으로 모든 것을 알 수 있게 해야 한다. 예컨대, ‘당신의 뒤태를 걱정하는 바쁜 아침의 도시락’, ‘날씬한 포만감을 바라는 여친의 정찬’, ‘붓지 않은 아침 얼굴을 위한 야식’ 같이 읽는 순간 맛과 향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식탁 위에 리포밍 도시락을 배치하고 사진을 찍은 후 제조법, 난이도, 품평을 적어 인터넷에 올리면 비로소 도시락 콜라보레이팅은 끝이 난다. 주희의 블로그는 1인 가구 사람들이 많이 방문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입소문이 났다. 올 초, 직장인들의 취미, 여행, 음식 등을 다루는 인터넷 매거진과 연재 계약을 맺었다. 그녀가 쓰는 ‘소중한 당신을 위한 행복 도시락’ 칼럼은 매주 금요일 실린다.



문제는 생각지도 못한 순간 나타났다. 주희는 여느 때처럼 스마트폰의 배달 앱을 통해 새로 나온 편의점 도시락과 밑반찬용 식재료를 주문했다. 늘 이용하던 심부름 서비스 회사였다. 10분 안에 도착합니다, 라는 문자 메시지를 받은 후 주희는 신발장에서 남자 구두와 운동화를 꺼내 슬리퍼 옆에 나란히 놓았다. 방문 옷걸이에 남자 와이셔츠를 걸었다. 남성용 향수도 출입구에 뿌렸다. 욕조 샤워기를 세게 틀었다. 화장실 문을 닫았다.

현관문을 열었다. 배달원이 바구니를 들고 들어왔다. 얼굴이 익은 남자였다. 그는 주문한 물건들을 거실 바닥에 하나씩 내려놓기 시작했다. 주희는 화장실을 향해 소리쳤다.

“얼른 끝내고 도와줘!”

머리를 금발로 염색하고 귀에 귀걸이를 한 배달원은 입술을 왼쪽으로 치켜 올리며 풋, 하고 웃었다.

“에이, 혼자 사시잖아요.”

그의 말은 총알이 되어 주희의 유리 거실을 와장창 부셔 버렸다.



편의점 가는 길은 낯설었다. 가게 간판도 많이 바뀌었다. 변하지 않은 것은 도시락을 사러 걸어가는 시간이 여전히 고통스럽다는 것뿐이었다. 햇빛이 아팠다. 커다란 선글라스를 쓰고 캡 모자를 깊숙이 눌러 썼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다. 어쩔 수 없었다. 배달시킬 용기는 이제 사라졌다. 빨리빨리 원고 좀 보내라는 편집장의 독촉은 며칠 째 계속됐다. 3군데 편의점, 1군데 도시락 전문점, 반찬 가게를 거치는 최단 코스를 미리 노트북으로 확인했다. 순서를 잘 암기했다. CU와 GS25를 거쳐 세븐일레븐에 갔다. 도시락 매대 앞에 섰다. 판매 1위 도시락을 집었다. 내용물을 확인했다. 방송에 자주 나오는 요리연구가의 불고기 도시락이다. 메인 반찬인 제육볶음을 살폈다. 매운 소스 베이스에 청양고추가 섞여 있다. 강한 맛을 달래 줄 다른 반찬이 있으면 좋으련만. 여자 연예인이 광고하는 2분 김치찌개 도시락도 살펴봤다. 렌지에 넣고 돌리면 얼큰한 찌개가 만들어진다. 담담한 후식이 아쉬웠다. 도시락들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편의점 자동 유리문이 으르렁거리며 열렸다. 남자 둘이 들어왔다. 소주와 맥주를 집었다. 담배 두 갑을 직원에게 달라고 했다. 둘은 안주거리를 고르면서 욕이 반쯤 섞인 별 내용 없는 대화를 주고받았다. 서로 머리통을 때리며 거친 장난을 했다. 머리카락을 고슴도치처럼 바짝 올려 세운 남자는 입을 벌릴 때마다 시궁창 냄새를 풍겼다. 어깨가 산처럼 크고 문신이 귀 뒤까지 이어진 다른 남자는 생리대가 진열된 매대에 서서 고슴도치 머리에게 뭐라고 말했다. 그는 생리대를 만지작거리며 낄낄댔다. 술 냄새가 편의점 안을 가득 채웠다. 주변에 있던 여자 둘이 서로 눈짓을 교환하더니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문신 남자는 분홍색 옛날 소시지를 집었다. 주희와 눈이 마주쳤다. 소시지는, 벌겋게 달아 오른 소시지는, 편의점에 오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쳤을 병원균이 잔뜩 묻어 있는 거대한 소시지는, 주희의 질 안을 무자비하게 헤집던 소시지는, 핸드폰에 고스란히 촬영되던 분홍 소시지는, 독사 대가리처럼 이쪽을 노려보았다. 본능적으로 몸을 출입문 쪽으로 틀었다. 남자는 주희의 150도 시야각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160도나 170도, 흐릿한 사각 지점 어딘가에서 주희의 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핥는 것만 같았다. 쿡쿡대는 웃음소리가 뒤쪽에서 들렸다. 들고 있던 장바구니가 덜덜 떨렸다. 편의점 너머 바깥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주희는 그대로 자동 유리문을 향해 돌진했다.

“손님, 계산하셔야죠!”

알바생이 소리쳤다. 장바구니를 바닥에 내던졌다. 도시락들이 뒹굴었다. 뒤도 안 돌아보고 나왔다.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똑같은 간판과 똑같은 냄새를 풍기는 가게 앞을 지났다. 빨간 불이 켜져 있는 횡단보도 앞에 겨우 멈춰 섰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신호등 기둥을 잡고 주저앉았다. 태양은 더 뜨거워졌다. 마스크를 벗었다. 숨을 몰아쉬었다. COPD 환자의 거친 숨기척이 폐에서 났다. 이마의 식은땀이 뺨을 타고 내려 턱 밑에서 모였다.

다, 다, 다, 다. 엔진 소리가 들렸다. 오토바이가 주희 앞에 멈춰 섰다. 검은 헬멧을 쓴 남자가 빤히 주희를 내려다보았다. 새까맣게 코팅된 전면 실드 보호유리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달려라! 하이바. 심부름 & 집안일 전문. 뒷좌석 짐칸 위에 그렇게 적힌 깃발이 펄럭였다.

“괜찮아요?”

헬멧 남자는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주희에게 물었다.



402호 할아버지는 언제나처럼 분리수거 장소를 지켰다. 밤마다 거실을 뛰어다니는 천방지축 손자도 함께 있었다. 할아버지는 화를 자주 냈다. 병 담는 자루에 플라스틱 요구르트 병을 잘못 넣기라도 하면 득달같이 달려와 끝이 뾰족한 지팡이로 삿대질을 하며 잔소리를 해댔다.

주희는 빈 플라스틱 도시락 케이스를 우르르 마대에 쏟아 부었다. 402호 할아버지는 주희의 행동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다가와 말했다.

“이봐, 아가씨. 웬 플라스틱 쓰레기가 이렇게 많아? 이런 일회용품을 많이 쓰니 쓸데없는 낭비가 생기는 거야. 자원 낭비. 에너지 낭비. 돈 낭비. 청소 인력 낭비. 시간 낭비. 쯧쯧. 젊은 여자가 밥을 해먹어야지 만날 인스턴트 음식이나 먹고.”

어느 틈에 곁에 온 손자는 나뭇가지로 마대자루를 쿡쿡 찌르며, 돈 낭비, 시간 낭비, 라고 앵무새처럼 따라 했다.



오토바이 한 대가 원룸 빌라 앞에 섰다. 달려라! 하이바, 라고 쓰인 깃발이 바람에 펄럭였다. 헬멧 남자는 뒷좌석 박스에서 배달 물건을 꺼냈다. 할아버지가 그를 발견하고 부르려 했지만 순식간에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할아버지는 문 앞에서 기다렸다. 들어갈 때와 마찬가지로 헬멧 남자는 쏜살같이 뛰어 나왔다. 오토바이에 올라탄 순간 할아버지가 붙잡았다.

“젊은이. 전번에 우리 집 수리 해준 사람 맞지?”

“…….”

“아, 그 왜, 며칠 전에 형광등 갈고 방문 덜렁거리는 것도 고쳐 주고 했잖아?”

노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남자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안방 문이 다시 덜렁거려. 그래서 그때 내가 말했잖아. 경첩을 좀 더 빡빡하게 조여야 된다고. 그리고 액자 걸어 둔 것, 벽에서 못이 빠져 버렸어. 얼른 와서 AS 해줘.”

“죄송합니다만 지금 배달할 물건이 많아 곤란합니다. 나중에 꼭 다시 올게요.”

“시방, 뭔 소리여, 돈 받아먹을 땐 언제고 이제 와 그렇게 말을 해?”

할아버지는 어깃장을 부렸다. 남자는 통사정을 했지만 노인은 말을 듣지 않았다.

“노인네가 이렇게까지 말하면 네, 알겠습니다, 하고 냉큼 와야지!”

딱, 딱, 딱. 할아버지는 긴 지팡이로 남자의 헬멧을 내리쳤다.

“그리고 어르신 말하는데 어디 시건방지게 얼굴도 내보이지 않고 있어? 당장 헬멧 벗어!”

“헬멧 벗어!”

꼬맹이는 노인의 말투를 똑같이 따라 했다.

남자는 오토바이에서 내렸다. 똑바로 서니 덩치가 꽤 컸다. 노인의 구부정한 허리를 반으로 꺾어 버릴 만큼 팔뚝 근육이 우락부락했다. 앞으로 한걸음 성큼 다가 왔다. 노인은 어, 어, 하면서 뒤로 물러났다. 지팡이를 방패처럼 들었다. 눈동자에 두려움이 서렸다. 꼬마는 비명을 지르며 건물 계단 쪽으로 달아났다.

횡단보도 앞에 주저앉아 있던 주희를 보던 것처럼 그는 우두커니 늙은이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보도블록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털썩 소리가 날 정도였다. 고개를 숙였다. 커다랗고 단단한 검은 헬멧이 바닥을 향해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그는 어릿한 목소리로 내일 아침 일찍 와 보수해 드리겠다고 약속했다. 할 말을 잃은 노인은 입맛만 다셨다. 주희는 깃발에 적힌 블로그 주소를 기억했다.





각종 배달 및 구매 대행. 관공서 업무 대행. 줄서기 대행. 집안 일 도우미(못 박기, 가전제품 폐기 처리, 전등 교환, 간단한 수리 등). 24시간 무엇이든 도와드립니다. 카드 결제 불가.

포스트잇을 덕지덕지 붙인 듯한 조잡한 사이트에는 세상의 온갖 잡일이 나열되어 있었다. 일 종류, 배송 거리, 작업 시간에 따른 가격표가 보였다. 만월에는 서비스가 안 됩니다. 중간 쯤 당구장 표시와 함께 볼드체로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만월이 무엇일까. 만 원을 잘못 적은 것 같다. 하단에 나의 취미 생활이라는 메뉴가 보였다. 클릭했다. 외계인의 실체, 우주의 신비, 달에 관한 21가지 비밀 같은 SF 가십거리들이 잔뜩 링크되어 있었다.



물건은 화요일, 금요일 오전에 배달되었다. 도시락 유통 기간이 짧아 일주일에 최소 두 번은 받아야 했다. 당근, 계란, 콩나물 같은 식재료도 종종 시켰다. 배달 가방에 차곡차곡 쌓인 순서로 보아 남자는 편의점에 들려 도시락을 산 후 마트에서 장을 보는 것 같았다. 음식은 네모난 보온 스티로폼 상자에 담겨 왔다. 물건은 건물 1층 경비실 옆에서 건네받았다. 헬멧 남자는 거의 말이 없었다. 스크래치가 나 여기저기 칠이 벗겨진 검은 헬멧을 쓴 채 처음에 한 번, 돌아갈 때 한 번, 꾸벅 인사만 했다.

물이나 우유 같은 것들을 주문한 날은 상자가 몹시 무거웠다. 상자를 안고 엘리베이터 앞에서 낑낑거리고 있을 때였다. 돌아간 줄 알았던 헬멧 남자가 어느 틈에 다가와 들어 주었다. 괜찮다고 했지만 집 앞까지 가져다주었다. 그날 남자는 길고 완전한 문장으로 이렇게 말했다.

“다음부터는 물건을 문 앞에 놓고 가겠습니다. 1층까지 내려오지 마세요.”

주희도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낯선 남자가 자신의 공간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불안했다. 표정을 읽은 그가 바로 말했다.

“물건 내려놓고 초인종 누르면 대금은 문틈으로 밀어 넣어 주세요.”

남자는 상의주머니에서 차가운 콜라를 꺼내 배달 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이건 단골 고객 서비습니다.”

남자는 계단을 이용해 후다닥 달려 내려갔다.



여자 혼자 사는 공간에는 무엇이든 자주 고장이 났다. 빨래 건조대의 가운데 기둥이 부러졌고 붙박이 옷걸이 못이 벽에서 빠졌다. 기타 주문 란에 새로 산 건조대의 조립 설치와 못 박기 서비스를 신청했다. 방의 형광등도 갈아 달라고 했다. 건당 4천원이었지만 VIP 고객이라 특별히 천 원을 빼 주었다. 그는 커다란 공구 가방을 들고 나타났다. 주희는 미리 현관문을 열어 놓고 기다렸다. 작업을 하는 동안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복도에 서서 집안을 지켜봤다. 남자 신발과 와이셔츠를 미리 내놓을까 하다 그만 두었다. 그는 작업하는 내내 헬멧을 벗지 않았다. 전면의 새까맣게 코딩된 보안경 때문에 얼굴은 물론 표정도 전혀 읽을 수 없었다. 쌀쌀한 날씨임에도 남자의 등은 땀에 푹 젖었다. 상의 조끼 위로 배어 나온 허연 소금기가 북아메리카 지도처럼 보였다. 주희는 냉커피용 봉지 커피를 꺼내 유리컵에 부었다. 찬물을 넣고 저었다. 얼음 몇 개를 집어넣었다. 빨대를 꼽은 후 접시에 받쳐 헬멧 남자 옆에 놓고 밖으로 나왔다.

잠시 후 남자가 나와 다 됐다고 했다. 혹시 문제가 생기면 무료로 AS해 주겠다는 말도 했다. 검고 둥근 헬멧이 꾸벅 인사를 했다. 남자는 공구를 들고 사라졌다. 그가 머문 자리에는 빈 유리컵만 놓여 있었다. 계속 뒤에서 지켜보았지만 헬멧 벗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도대체 어떻게 커피를 마신 걸까.



금요일 늦은 밤, 편집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목소리가 급했다.

“주희 씨. 오늘 회의에서 ‘한겨울을 훈훈하게 해주는 도시락’이라는 테마로 특집 판을 내기로 결정했어. 곧 옆구리 시린 겨울이 오잖아? 근데 시간이 별로 없어. 다음 호에 바로 싣기로 했거든. 미안하지만 내일 아침 8시까지 따끈따끈한 신상 도시락 하나 만들어 줄 수 있을까?”

“다음 호에는 여행 도시락 편 아닌가요? 그건 오후에 메일로 보내드렸는데.”

“알아, 알아. 갑자기 주제가 바뀌었어. 사장이 하도 고집을 부려서.”

“편집장님. 지금 밤 11시가 넘었어요. 이 시간에 언제 새로 도시락을 사다가 분석하고 조리하고 사진 찍고 글을 쓸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우리 출판사에서 제일 능력 좋은 주희 씨에게 이렇게 부탁하는 것 아니야, 응?”

푸드 매거진에 실을 글은 내용보다 사진이 중요하기 때문에 빛이 좋은 낮에 만들어야 한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편집장이 무리한 부탁을 하는 것은 그럴 사정이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내일 출근하면 쌈빡한 샘플 하나 바로 봅시다, 라며 명령 비슷한 부탁을 하고 바로 퇴근해 버린 새파랗게 젊은 금수저 사장에 대한 편집장의 흉은 한참 계속 됐다.

전화를 끊자마자 헬멧 남자에게 문자를 보냈다.

“GS25 ‘얼큰 국물이 있는 정찬’과 세븐일레븐 ‘콩나물 해장 도시락’, 만일 지금 사거리 반찬 가게가 열었으면 반찬 세트 1, 3, 6번, 바로 배달 부탁드립니다.”

답장은 금방 왔다.

“죄송합니다. 지금 배달 안 됩니다.”

“24시간 배달 아닌가요?”

“만월에는 배달 못 합니다.”

“만 원?”

“만월(滿月), 보름달이 뜬 밤.”



낮에도 나가질 못하면서 한밤중에 도시락을 사올 자신은 없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다른 심부름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은 더더욱 싫었다. 전날 사다 놓은 도시락들은 낮에 다 버렸다. 냉장고 안에 쓸 만한 식재료도 별로 남아 있질 않아 당장 무언가를 만들어 내기도 마땅치 않았다. 한참을 고민했다. 편집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도저히 안 되겠다고 말했다. 지금 바로 편의점에 가서 비주얼 좋은 것 몇 개 사가지고 와 적당히 데코레이션 하면 되잖아? 그의 목소리에 짜증이 잔뜩 섞였다. 결국 편집장은 다른 프리랜서에게 부탁하겠다며 전화를 끊어 버렸다.

주희는 커튼을 걷었다. 밤하늘을 바라봤다. 보름달이 밝았다. 그 앞을 느릿느릿 흘러가는 성성한 구름이 단무지처럼 노르스름하게 물들었다. 달빛이 거실로 한 발자국 들어왔다.



평소보다 이른 아침에 일어났다. 뒤척이다 늦게 잤지만 저절로 눈이 떠졌다. 출판사로부터 온 메일을 확인했다. 이번 달 말까지 2편 더 쓰고 계약 종료하자는 내용증명서였다. 내심 계약 연장을 기대했지만 헛된 바람이 되어 버렸다. 한숨이 나왔다. 상사에 대한 어젯밤 작은 항명이 이런 결과가 되어 돌아온 것만 같았다.

아침 준비를 하려는데 핸드폰으로 문자가 왔다. 헬멧 남자였다.

“지금 가져다 드릴까요?”

“너무 늦었어요. 이제 필요 없게 됐어요.”

“이미 1층에 와 있는데요.”

주희는 오도카니 문자를 바라보다가 답신을 보냈다.

“지금 다른 서비스 더 주문해도 돼요?”



둘은 1층 경비실 옆 휴게실에서 만났다. 입주민들이 외부 방문객과 만남의 장소로 이용하는 곳이다. 간이 탁자 위에 도시락들을 펼쳤다. 주희는 직접 만든 콩나물무침과 계란 프라이를 가지고 내려왔다. 헬멧 남자가 말했다.

“아침식사 함께 하기, 라는 주문은 난생 처음입니다.”

그는 헬멧 왼쪽에 붙어 있는 버튼을 눌렀다. 턱 아래 부분이 덜컥, 옆으로 열렸다. 빠져나온 네모난 플라스틱 받침 부분을 반 바퀴 돌린 후 헬멧 좌측에 있는 안전 고리에 걸어 고정시켰다. 붉은 입술이 밖으로 드러났다. 정리되지 않은 수염 때문에 입가는 감자밭을 파헤친 야생 멧돼지의 주둥이처럼 보였다.

주희는 남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코팅된 검은색 보안경에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마치 거울을 마주하고 밥을 먹는 것만 같았다. 남자는 열린 구멍으로 익숙하게 밥과 반찬을 밀어 넣었다. 콩나물무침을 한 움큼 집어 먹더니 직접 만든 거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다.

“즉석 밥과 참 잘 어울려요. 보통은 삶은 콩나물을 찬물에 헹구고 파, 마늘, 고춧가루, 참기름으로 버무린 다음에 진간장 살짝 넣어 만드는데. 이건 거기다 뭔가를 더 첨가해 특별한 맛이 나는군요. 계란 프라이도 좋네요. 흰자는 바짝 튀겨졌고 노른자는 촉촉한 반숙. 스팀 베이스티드로 하셨나요?”

계란 프라이에 물을 약간 부은 후 중불에서 노른자를 증기로 익히는 스팀 베이스티드 방법을 그는 알고 있었다. 주희가 물었다.

“음식 잘 하시나 봐요?”

“조금요. 집안 일 서비스 중에 반찬 만들기도 있어서요.”

말할 때마다 커다란 검은 헬멧이 야외 행사장 풍선 인형의 거대한 머리통처럼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까딱였다. 그가 물었다.

“뭐 하나 물어봐도 괜찮겠습니까?”

“물어보세요.”

“왜 만날 도시락만 배달시켜요?”

“먹으려고 시킨 건 아니에요.”

“그건 알아요.”

“어떻게요?”

“이렇게 많은 걸 어떻게 다 먹겠어요? ……혼자서.”

주희는 도시락 리포밍에 대해 설명했다. 레디메이드 반찬을 어떻게 조리하고, 조합하는지, 어떤 밑반찬을 더하거나 빼면 같은 가격에 최고의 맛과 영양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 이야기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먹었다.

식사는 금세 끝났다. 휴게실 바깥 로비가 조금씩 시끄러워졌다. 출근을 하기 위해 말끔히 차려 입은 젊은이들이 부지런히 회전문을 열고 나갔다. 남자는 빨대를 꼽아 물을 마셨다. 크리넥스 티슈를 헬멧 안으로 밀어 넣고 입을 닦았다. 헬멧 아래 부분의 플라스틱 덮개를 원래 위치로 돌렸다. 딸깍 소리와 함께 입술이 사라졌다.

“잘 먹었습니다.”

안주머니에서 옥수수차 캔을 꺼내 주희 앞에 놓았다. 따듯했다.

“아침부터 찬 음료는 좋지 않을 것 같아서요.”

“저도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네.”

“어젠 왜 배달을 못한다고 했어요?”

남자는 주희의 물음에 당황한 듯 했다. 얼굴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지문이 반쯤 마모된 뭉툭한 다섯 손가락과 일로 다져진 팔뚝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이 그래 보였다.

“……달 때문에요.”

“농담하지 마세요.”

“농담 아닙니다. 보름달이 있는 밤엔 배달을 하지 않습니다.”

“왜요?”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헬멧을 벗으면 그 안에 늑대인간이 있는 건 아니겠죠?”

농담은 어색한 침묵으로 돌아왔다. 남자는 탁자 위만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헬멧 버튼을 눌렀다. 아래쪽 덮개가 열리면서 수염투성이 하관이 다시 나타났다.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한 달에 한 번. 완전한 달을 볼 수 있는 그땐, 제게 중요한 시간입니다.”

“…….”

“……난 알고 있습니다. ……달의 진실을. 누구도 모르는 사실을요. 태양 빛을 반사시키는 표면, 지구를 향한 쪽의 달은 진짜가 아닙니다. 진실은 그 뒤편에 있어요. 달이 가장 크고 밝을 때 나는 항상 달을 바라봅니다. 그 때문에 작년 말엔 천이백만 원이나 주고 독일제 천체 망원경을 샀어요.”

신중하게 단어를 선택하고 문장을 조리 있게 만들려는 노력이 눈에 보였다.

“달의 실상을 알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어요. 하지만 뭣도 모르는 사람들은 이러쿵저러쿵 맘대로 이야기를 만들어 내죠. 달 뒤편에 얽힌 음모론은 수백 가지가 넘습니다. 숨겨진 유에프오 비행장이 있다, 거대한 피라미드가 있고 거기서 지구의 인간들을 조정한다, 인류를 창조한 외계인들이 살고 있다. 하지만 다 헛소리에요. 믿을 만한 것은 오직 하나뿐. 그것은…… 달의 노래에 대한 것이에요.

아폴로 11호가 달에 첫 발을 내리기 전부터 미국은 달을 탐사해 왔어요. 11호의 전신 아폴로 10호는 달 궤도를 돌면서 오랫동안 달 표면을 조사했죠. 1969년 5월 23일, 아폴로 10호의 우주인들은 달의 뒤편에서 이상한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신호음 같기도 하고 음악소리 같기도 한, 높낮이가 있고 장단이 있는, 우, 우, 우, 우, 하는 기괴한 소리를 세 명의 우주인 모두 또렷이 들었답니다. 증거는 명확해요. 그때 녹음한 소리도 있고 공포에 질린 우주인의 표정이 생생히 찍힌 영상도 있습니다.”

말이 잠시 끊어졌다. 입술이 떨렸다. 빳빳한 수염이 상처 입은 고슴도치의 바늘처럼 심하게 꿈틀댔다. 남자는 혀로 바짝 마른 입술을 핥았다.

“보름달이 환하게 뜬 어느 날 밤이었어요. 그날도 난 변함없이 달을 관찰했습니다. 그리고 아주 우연히 소리의 정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

“달은 천천히 자전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자신의 부끄러운 뒷모습을 제게 보여주었습니다. 난 그날 달의 뒤편을 보게 되었어요.”

“…….”

“거기엔 외계인도 UFO도 인간을 창조한 신도 없었습니다.”

“…….”

“그곳에는 오직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만이 있었습니다.”

“…….”

“달 뒤편에서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던 그들은.”

“…….”

“아픔도, 억울함도, 분노와 자기 파멸도 없는 세상에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

“그제야 나는 이 무거운 헬멧을 벗고 편히 쉴 수 있었습니다. 날 평생 짓누르던 짐을 내려놓는 순간 견딜 수 없는 피곤이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난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만질 수도 없을 만큼 아픈 무엇이 빠져나갈 구멍을 찾지 못하고 주희의 내장 속을 요동쳤다. 그것은 심장과 폐와 위장에 시퍼런 멍을 만들었다. 상처 입은 세포에서 오래된 피고름이 터져 흘러 내렸다. 주희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기괴한 모양의 바위투성이. 누런 모래 폭풍. 영하 수백 도까지 내려가는 추위. 하늘을 뒤덮은 번개와 천둥. 칠흑 같은 어둠. 달 뒤편에는 그것뿐이에요. 다른 건 아무것도 없어요.”

헬멧 남자는 말을 잊은 채 멍하니 주희를 바라보기만 말했다.

“그쪽 말은 틀렸어요.”

“아니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헬멧 남자의 언성이 높아졌다. 주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걸, 어떻게! 어떻게, 확신하죠?”

“난 그곳에 가 봤으니까요.”

주희는 한기를 느꼈다. 캔 뚜껑을 땄다. 톡하는 소리와 함께 열린 구멍에서 하얀 김이 올라왔다. 차를 마셨다. 따듯한 물이 햇빛에 씻긴 옥수수 향을 풍기며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온기가 혈관을 따라 돌았다. 헬멧 전면 보안경 속의 반투명한 주희가 말했다.

“달 뒤편에는 부서진 영혼과 손가락질뿐. ……아무 것도 없어요.”



남자가 일어났다. 그가 앉았던 의자가 바닥을 긁으며 비명을 질렀다. 빈 플라스틱 도시락을 겹쳐 포갠 후 비닐봉지 안에 넣었다. 음료수 병도 집어넣었다. 테이블에 흘린 음식물도 휴지로 모두 닦아냈다. 오토바이 장갑을 끼고 헬멧 턱 끈을 조였다. 쓰레기봉투를 들고 주희 앞에 섰다. 어떤 세제를 써도 지울 수 없을 만큼 얼룩진 타일 바닥에 선 그는 꾸벅 인사를 했다.

“아침 잘 먹었습니다.”

“…….”

“그리고 죄송합니다.”

그는 뒤돌아 밖으로 나갔다. 검은 헬멧이 출렁였다.



메일을 확인했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의 출판사였다. 블로그를 보고 연락했다, 일단 3개월 단기 계약을 하고 싶다, 먼저 아침 식사용 도시락 샘플을 하나 보내 달라, 라는 내용이었다. 홈페이지를 살펴봤다. 출판사는 싱글 라이프를 위한 여러 가지 테마를 다뤘다.

손쉽게 만들 수 있지만 맛과 영양을 고려할 것. 제조 단가는 너무 높지 않을 것.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운 비주얼. 산뜻한 디저트까지 곁들이면 더 좋음. 5대 영양소를 갖춘 건강한 도시락. 담당자는 그런 조식 도시락을 원했다.



편의점 도시락들을 거실 탁자 위에 주르르 펼쳐 놓았다. 아침 식사이기 때문에 너무 맵거나 짜서는 곤란하다. 해장용 얼큰 찌개류와 간장 베이스 반찬은 제외시켰다. 뻑뻑한 식감도 좋지 않다. 닭 가슴살로 만든 반찬을 뺐다. 기름 맛이 강한 돈가스와 튀김 종류도 건져냈다. 끝까지 살아남은 찬은 어묵 야채 볶음, 양배추와 옥수수 마카로니가 버무려진 샐러드 볼, 도시락에 딸려 나온 국과 후식 방울토마토다.

냉장고 안에서 콩나물무침, 명이나물, 고구마줄기, 계란을 꺼냈다. 고구마줄기를 손질한 후 약한 소금물에 데쳤다. 국간장과 어간장, 다진 마늘을 넣어 만든 양념을 프라이팬에 넣고 함께 볶았다. 들깨가루를 몇 술 더 넣고 뒤적였다. 그릇에 옮겨 담았다. 고소한 향이 올라왔다. 새 프라이팬을 꺼내 달구고 식용유를 둘렀다. 계란 프라이를 만들었다. 물을 조금 붓고 중불로 바꿨다. 뚜껑을 덮고 30초간 기다렸다. 뚜껑을 열었다. 촉촉해진 계란 노른자 표면이 보름달처럼 반들거렸다. 포크와 숟가락으로 노른자와 흰자를 조심스럽게 분리했다. 맑은 된장국과 햇반을 전자레인지로 돌렸다.

식탁 위에 푸른색 테이블보를 깔았다. 가장 예쁜 도시락 용기를 꺼냈다. 밥 넣는 칸에 고슬고슬 해진 햇반을 담았다. 스팀 베이스티드로 익힌 계란 노른자를 하얀 밥 위에 얹었다. 빛깔 좋은 어묵 야채 볶음은 밥 위쪽 칸에 놓았다. 고구마줄기볶음은 왼쪽, 헬멧 남자가 좋아하던 콩나물무침과 명이 나물은 오른쪽 칸에 담았다. 후식 칸에 샐러드 볼과 방울토마토를 넣었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된장국은 그릇에 따로 담아 도시락 옆에 놓았다. 조화 한 송이를 대각선 방향으로 눕히고 도시락 주위에 꽃잎 몇 장을 뿌렸다. 오른쪽 위에 조명등을 설치했다. 반대 방향에 반사판을 놓았다. 여러 방향에서 사진을 찍었다. 적정 노출보다 밝게 촬영하고 필터도 바꿔 봤지만 맘에 들지 않았다.

커튼을 활짝 젖혔다.

밖에서 기다리던 빛들이 다투어 거실 안으로 쏟아졌다. 세팅한 도시락을 다시 찍었다. 색감이 좋았다. 음식 사진에 자연광만한 것이 없다는 말은 틀림없었다. 마음에 드는 몇 장을 골라 포토숍으로 보정했다. 워드프로세서로 도시락 리포밍 과정을 자세히 적었다. 문장을 다듬었다. 도시락 이름을 생각해 보았다. 단어 몇 개가 낡은 전등처럼 머릿속에서 깜박거렸지만 조합이 쉽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적었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주희는 새하얀 쌀밥 위에서 봉긋이 솟아 반들거리는 계란노른자를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달 뒤편에서의 조식. 그렇게 적어 출판사로 메일을 보냈다.



저녁때 주문한 택배가 왔다. 상자를 열었다. 흰색 헬멧이 스티로폼 완충재 사이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 꺼내 상태를 살펴봤다. 전면 실드 코팅이 옅어 안이 잘 보였다. 마른 걸레로 겉면을 닦았다. 내부는 가죽 전용 크림으로 윤을 냈다. 주희는 헬멧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어찌 할까 고민을 했다.



오늘도 402호 할아버지는 잔소리를 해댔다. 기다란 지팡이로 이리저리 마대 자루를 쿡쿡 찔렀다. 분리수거함 위에 커다랗게 써 넣은, 폐지, 병, 깡통이라는 글자에 맞추어 제대로 버리지 않으면 어김없이 큰소리가 들려왔다. 버르장머리 없는 꼬마도 마대를 들쑤시며 신나게 돌아다녔다.

다, 다, 다, 다. 엔진 소리가 들렸다. 달려라! 하이바, 깃발을 나부끼며 오토바이가 주택가로 들어오고 있었다.

“귀청 떨어진다! 이놈아!”

할아버지는 소리 나는 쪽을 향해 소리쳤다. 꼬마도 바이크를 보고 따라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곧 천진난만한 웃음소리로 바뀌었다. 아이는 남자의 헬멧을 가리키며 펄쩍펄쩍 뛰고 박수를 쳐 댔다.



헬멧 위로 곤충의 더듬이처럼 탱탱하고 길쭉한 것이 양 갈래로 비쭉 올라와 있었다. 더듬이 끝에는 둥근 물체가 붙었다. 눈망울이 크고 산뜻한 두 개의 눈동자였다. 갈바람에 흩날리는 속눈썹은 낙타의 것을 닮았다. 오토바이가 다가왔다. 바퀴가 도로 안전 턱을 넘을 때마다 청명한 두 눈은 세상을 향해 출렁였다. 순백 색 하이바. 춤추는 눈동자. 헬멧은 눈 쌓인 낮은 언덕처럼 둥글고 맑게 빛났다.
남현정 기자
남현정 기자 nhj@kyongbuk.com

사회 2부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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