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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병진 경주지역위원회 위원
어느 잡지에서 ‘찌그러진 냄비 사랑’이란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노란 냄비는 아들들 라면 끓여주던 냄비라 못 버리고, 손잡이가 없는 냄비는 아들 낳고 미역국 끓여 먹던 것이라 못 버리고, 시커먼 냄비는 영감이 그곳에 된장을 끓여야 맛있다고 해서 못 버리고, 밥그릇은 닦을 때마다 정이 들어선 지 내 손에 딱 맞아 못 버린다”는 이야기였다.

남이 볼 때는 볼품없고 가치 없어 보이는 것일지라도 자신에겐 의미 있는 것, 정이 담긴 것, 사연이 있는 것들이 있다.

냄비 하나하나에 아들들이 자라는 모습, 남편이 맛있게 된장국을 먹던 모습, 자신이 정성을 들여 그릇을 닦고 살림을 하던 모습들이 담겨 있어 함부로 버릴 수 없는 생활용품들이 있게 마련이다. 젊은이들이 박물관에나 가져다주라는 핀잔을 할지라도.

시중에 ‘청송막걸리’라는 술집이 있다. 살얼음이 낀 막걸리를 한 사발 들이키면 짜릿한 차가움이 식도를 타고 내려간다. 속의 천불까지 싹 꺼줄 것 같다.

천정에 달아놓은 주전자들이 전부 찌그러졌다. 내가 청송막걸리 집을 찾는 것은 속에 천불보다 육칠십 년대 막걸리 마시던 향수 때문인지도 모른다.

쥐어박아 찌그러지게 한 주전자. 한 되의 막걸리가 팔 홉밖에 되지 않아도 주전자 수를 세면서 마셨던 추억에 마음이 푸근해진다.

내가 쓰는 작은 책상에는 항상 구질구질한 물건들이 쌓여있다. 딱히 금방 쓸 것도 아니고, 언제 쓰일지도 모르는 물건들이다. 깔끔이라는 것이 아예 없다. 책상 정리조차 잘할 줄 모르는 멍청이다. 좀 모자라는 대로 살고, 정이 가는 대로 살고, 금방 만지던 물건도 잊어버리고 한참을 찾는 헛수고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 생활이 좋다는 말이 아니다. 그저 나라는 사람이 찌그러진 냄비 같은 사람이고, 수더분한 생활에 젖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아내로부터 잔소리 듣는데 이골이 난 사람이란 말이다.

이제 칠십 중반에 들면서 좀 정리하면서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어 본다. 사회적인 일이나, 집안일이나, 버릴 것은 버리고 끊을 것은 끊고 단순하게 만들고 싶다. 생활을 단순화하고, 욕심을 줄이고 싶다.

그런데 그게 마음먹은 대로 안 된다. 중독이란 것이 있는 모양이다. 새벽 4시만 되면 일어나 꿈지럭거려야 하고, 쓸데없이 아침 운동이랍시고 골목을 서성거리는 버릇도 버려지지 않는다.

휴대폰을 들고도 찾는 주제에, 달력에 적어놓고도 동기회 날짜를 까먹는 주제에 아직은 움켜쥐고 있는 것이 많다. 움켜쥐고 놓지 않는 것만이 아니라 새로이 긁어모으고 있는지도 모른다.

환경운동단체 일도 하고 싶고, 봉사단체 일도 하고 싶고, 교육계 일도 신경 쓰이고, 외국여행도 많이 하고 싶고, 소주도 서너 병은 먹고 싶다. 노욕이 가득한 추한 모습이리라.

‘찌그러진 냄비 인생’에서 출발하여 쭈그러진 멋밖에 몰라서 그런지 잘 안 된다. 찌그러진 주름들이 모두 정으로 느껴지니 탈이다. 초·중·고등학교 동창, 고향 선후배 교직 선후배 등 찌그러진 냄비같이 정이 든 벗들을 자주 만나 찌그러진 주전자를 기울이고 싶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김을 매던 논둑, 밭둑에 더 자주 가고 싶고, 지금은 독립하여 떠나버린 자식들의 어린 시절이 많이 생각나고, 만지고 만져도 닳아 없어지지 않을 아내의 손을 더 만지고 싶어진다.

찌그러진 냄비, 쭈그러진 주전자라도 좋다. 내 삶이 담기고, 내 정이 담긴 것이라서 소중히 여기고 싶다.

젊은 사람들의 구박, 딸년의 구박, 아내의 구박을 좀 받으면 어떠랴. 이것도 각박한 현실을 사는 멋대가리 없는 멋이라고 외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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