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색창연 古家 구석구석 꼬장꼬장한 선비 기상 오롯이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정구의 자(字)는 도가(道可)이고 호(號)는 한강(寒岡)이며, 시호(諡號)는 문목(文穆)이다.
본관(本貫)은 청주(淸州)다.
오건(吳健)에게 수학하고 조식(曹稙)과 이황(李滉)에게서 성리학(性理學)을 배웠다.
1613년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구하고자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특히 예학(禮學)에 밝았으며 당대의 대학자요, 명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다.
인조반정 후 이조판서로 추증받고 영의정에 증직됐다.
회연서원(檜淵書院), 천곡서원(川谷書院), 운곡서원(雲谷書院), 관산서원(冠山書院) 등과 통천(通川)의 경덕사(景德祠)에 제향(祭享)됐다.
칠곡의 인물인 석담 이윤우(李潤雨)는 한강 선생의 고제(高弟)로서, 관직에서 물러난 뒤 만년(萬年)에 스승 주위에 머물면서 선생을 도왔다.
한강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이윤우는 호상(護喪)이 되어 장례를 주관했으며, 선생의 언행록을 집필하고 유교와 유적을 모았으며, 선생의 유명(遺命)이기도 한 ‘오선생례설(五先生禮說)’을 간행했다.
이윤우는 공조참의지제교를 거처 가선대부이조참판이 증직(贈職)되고 사제문(賜祭文)이 내려졌다.
사후에는 회연(檜淵), 사양(泗陽) 등 서원(書院)에 단독 배향되고 오산서원(鰲山書院)에 봉향(奉享)됐다.
송암(松巖) 원경(遠慶)은 진락당(眞樂堂) 김취성(金就成)에게 사사했고 그 후 경학 공부에 전심했으며, 당대의 석학 오건(吳健), 강유선(康惟善), 여암(呂巖), 송사이 등 제현(諸賢)과 도의(道義)로 교유(交友)하고 높은 뜻을 함양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해 고상한 인격과 학식을 이뤘다.
1651년(효종 2)에 향인(鄕人)들이 한강 선생의 숭고한 업적을 받들어, 일생 동안 학업을 닦았던 사수(泗水)에 서원을 세워 한강 선생을 주벽(主壁: 사당이나 서원에 모신 여러 위패 중 주장이 되는 위패)으로 봉안했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17호로 지정돼 있는 사양서원에는 현재 한강 선생과 함께 석담 이윤우를 배향(配享), 송암(松巖) 원경(遠慶)을 방향(傍享)으로 모시고 있다.
△정구(鄭逑·1543~1620)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 철산군수 윤증(胤曾)의 종손으로, 할아버지는 사헌부감찰 응상(應祥)이고, 아버지는 김굉필(金宏弼)의 외증손으로 충좌위(忠佐衛) 부사맹(副司孟) 사중(思中)이며, 어머니는 성주이씨(星州李氏)로 환(煥)의 딸이다.
6대조 총(摠)과 그 아우인 탁(擢)이 개국공신에 책봉되는 등 본래 공신가문으로 대체로 한양에서 살았으나 부친이 성주이씨와 혼인하면서 성주에 정착했다. 둘째 형인 곤수(崑壽)는 문과에 급제해 병·형조 참판, 의정부좌찬성 등 주요 관직을 지낸 관리였다.
5세에 이미 신동으로 불렸으며 10세에 ‘대학’과 ‘논어’의 대의를 이해했다. 13세인 1555년 성주향교 교수인 오건(吳健)에게 역학을 배웠는데 건(乾)·곤(坤) 두 괘(卦)만 배우고 나머지 괘는 유추해 스스로 깨달았다 한다.
1563년에 이황(李滉)을, 1566년에 조식(曺植)을 찾아 뵙고 스승으로 삼았으며, 그 무렵 성운(成運)을 찾아 뵙기도 했다. 1563년 향시(鄕試)에 합격했으나 이후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했다.
1573년(선조 6) 김우옹(金宇?)이 추천해 예빈시참봉(禮賓寺參奉)에 임명됐으나 나가지 않는 등 여러 번 관직에 임명돼도 사양하다가 1580년 비로소 창녕현감(昌寧縣監)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통천군수(通川郡守)로 재직하면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했다. 1593년 선조의 형인 하릉군(河陵君)의 시체를 찾아 장사를 지낸 공으로 당상관으로 승진한 뒤 우부승지, 장례원판결사·강원도관찰사·형조참판 등을 지냈다. 전체적으로 중앙 관직보다는 지방의 수령으로 더 많이 활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