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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차별과 불공평은 인생의 필수조건입니다. 우리는 날 때부터 서로 다른 수저를 물고 태어납니다. 있는 집 아이로 태어나면 남보다 평탄한 인생길이, 없는 집 아이로 태어나면 굴곡 많은 인생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는 없는 집 아이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은 이북에서 피난 내려와 온갖 궂은일을 다하며 자식들을 키웠습니다. 특별한 재주도 없고 이재(理財)에도 밝지 못해 평생을 자기 집 하나 지니지 못한 채 떠돌다가 돌아가셨습니다. 물론 두고 온 고향에는 번듯한 직장도 있었고 집도 있었고 논밭도 있었고 선산도 있었습니다. 두 분 다 있는 집 자식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렇게 없이 살면서도 틈만 나면 있는 집 자식 티를 내곤 했습니다. 평소에도 웬만한 사람 앞에서는 기죽기를 죽기보다 싫어했습니다. 자식들이 자긍심을 잃고 문화적으로 낙후된 삶을 살까 봐 걱정이 많았습니다. 항상 줏대 있게 살라고 부추겼습니다. 그런 부모님의 태도가 균형감각의 부재로 여겨지던 때도 있었습니다. 물질과 정신의 괴리라고나 할까요? 가난을 해소하는 일이 급선무인데 엉뚱한 것에 더 치중한다는 원망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자식을 키워보니 생각이 좀 바뀌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그 오랜 ‘없는 집 아이 신세’를 용케 면하고 자식들을 ‘있는 집 아이’로 키울 수 있게 된 것도 다 그런 부모님 덕이 아닌가 라는 엉뚱한 생각도 드는 것입니다.

학창시절의 아르바이트를 포함해서 제가 평생동안 생업에 충실했던 까닭은 분명 제가 물고 태어난 그 흙수저 때문입니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 말라”라고 아버지는 자주 말했습니다. 아마 공산 치하에서의 무산자 콤플렉스가 그렇게 무의식적으로 표출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없는 집 아이’였던 제게는 “공부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로 들렸습니다. 그 덕에 어렵지 않게 대학도 가고 직장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성가(成家)한 뒤로는 그 말씀이 “식구를 굶기면 가장이 아니다”로 바뀌었습니다. 군대를 제대한 직후의 일입니다. 박사과정에 들어가서 학업을 계속하면서 박봉의 대학 시간강사로 지내는 것과 사범대학 출신답게 중등학교 발령을 받아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 그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게 되었습니다. 비정년트랙이긴 하지만 사관학교 교관도 국립대학 교수 신분인데 교수를 지내다가 중등학교 교사가 된다는 것이 좀 머쓱했습니다. 군대 동기들도 대부분 대학 쪽에서, 교수가 아니면 조교나 연구원으로라도, 자리를 찾고 있었습니다. 아내가 생활은 걱정하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말했습니다만 “식구를 굶기지 마라”라는 정언명령(?)을 도저히 거역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후 주경야독, 4년 동안 간간이 소설도 쓰고 르포도 쓰며 생업과 학업을 병행했습니다.

저를 아버지로 둔 저희집 아이들은 늘 불만이 많았습니다. 자식에게 통 투자를 하지 않는 아버지, 툭하면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 말라”라는 케케묵은 공산당 구호나 외치고, 시도 때도 없이 그저 자력갱생(自力更生)만 강조하는 시대착오적인 꼰대 아버지가 바로 저였습니다. 있는 집에 태어난 줄 알았는데, 유행하는 옷도 한 벌 안 사주고 과외도 안 시켜주고 대학도 국립대학만 보내주고, 왜 그렇게 없이 자라야 했는지 아이들은 그 까닭을 모르겠다고 투덜대곤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아주 잠잠합니다.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현재 처지에 크게 불만이 없는 것 같습니다. 다행입니다. 저는 없는 집 자식으로 태어나서 있는 집 아이들의 처지를 잘 모릅니다. 그저 부러움의 대상이었을 뿐 그들의 성취와 좌절을 속속들이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자식을 키울 때도 제가 아는 방식으로, 내 품삯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비용을 댈 수밖에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있는 집 자식이었던 아버지가 저를 그렇게 키운 것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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