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제 실천한 조선시대 대학자 노수신의 가르침 가득

봉산서원 전경.
상주시 화서면 사산리에 자리한 봉산서원은 영의정을 지낸 소재 노수신 선생과 6명의 선현을 모신 서원이다. 이 서원은 조선 중기 이후 선현을 제향하고 학문을 연구해 인재를 키우기 위해 전국 곳곳에 세워진 사설 교육 기관이다.

식산 이만부 선생의 ‘속리산기(俗離山記)’에 따르면 “봉산은 소재 선생께서 소요하던 곳이다. 예전에는 학사가 있었는데 지금은 서원이 됐다. 일송 심공과 판곡 성공을 소재에게 배향해 향사하고 있다”고 돼 있다.
봉산서원 현판
봉산서원의 모체는 조선 명종 때 상주 목사 영천자(靈川子) 신잠(申潛)이 세운 상주의 18개 서당 중 하나였다. 소재 선생께서는 유배에서 풀려나 관인으로 복귀한 뒤 때때로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내려와 봉산과 사곡 사이에서 자유롭게 거닐며 다녔다고 한다. 이때 서당에 들려서 지은 시가 지금도 전해지고 있는 아래의 시다.

봉산서원(鳳山書院) 취필(醉筆) 금재임귀덕(今宰臨歸德) 고향에 와서 보니 상주의 수령이 서당기화령(書堂起化?) 화령땅현에 서당을 세웠구려. 당시록동의(當時鹿洞意) 당시는 록동의 뜻을 따라 세웠겠는데 금일봉산명(今日鳳山名) 지금은 봉산서원이라는 이름이네. 유걸흥규제(有傑興規制) 빼어난 사람이 규제를 갖추어 일으켰으나 무인청액경(無人請額經) 편액과 책을 청하는 사람이 없었구려. 회두이십재(回頭二十載) 되돌아보니 이십 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불사노선생(不死老先生) 노 선생은 변치 않고 글공부를 시키는구나.

위의 시 내용처럼 소재 선생께서는 종종 서원에 나아가 글공부를 시켰다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1688년(숙종 14년)에 지역 유림들이 봉황산(化西面 鳳凰山) 아래에 사당을 세우고 이듬해에 강당을 건립했다.

1708년(숙종 34년) 무자(戊子)에 노수신(盧守愼) 선생을 배향(配享)하고 또한 일송 심희수(一松 沈喜壽), 판곡 성윤해(板谷 成允諧) 등 2분을 함께 배향하며 예조(禮曹)의 승인(承認)을 얻어 서당을 서원으로 승원(陞院)한 것이다. 이때가 소재 선생이 시호를 받아 나라에서 소재의 사당에 치제(致祭)를 할 즈음이었다.

그 후 성극당 김홍미와 이재 조우인, 동원 정호선, 백화재 황익재를 추배(追配)해 모두 7현(七賢)을 배향하게 된 것이다. 서원에서는 소재 선생을 비롯한 배향된 선현들의 춘추 향사는 물론 인근 지방의 젊은이들을 모아 공부를 시키기도 했다. 봉산서원은 소재 선생을 모시고 있는 서원이자 ‘화령’이란 지역의 규모에 비해 서원에 배향된 인물이 많아 상주에서는 도남서원 다음으로 규모가 큰 서원이다.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

1531년(중종 26년) 당시 성리학자로 명망이 있었던 이연경(李延慶)의 딸과 결혼해 그의 문인이 됐다. 27세 때인 1541년(중종 36년) 당대 명유(名儒)였던 이언적(李彦迪)에게 배우고 학문적 영향을 받았다.

1543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급제한 이후 전적(典籍)과 수찬(修撰)을 거쳐 1544년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가 되고 같은 해 사가독서(賜暇讀書)했다.

인종 즉위 초에 정언이 되어 대윤(大尹)의 편에 서서 이기를 탄핵해 파직시켰으나 1545년 명종이 즉위하고 소윤(小尹) 윤원형(尹元衡)이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이조좌랑의 직위에서 파직돼 1547년(명종 2년) 순천으로 유배됐다. 이후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돼 죄가 가중됨으로써 진도로 이배돼 19년간 귀양살이를 했다.

유배 기간 이황(李滉)과 김인후(金麟厚) 등과 서신으로 학문을 토론했고 진백(陳柏)의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주해했다. 이 주해는 뜻이 정교하고 명확해 사림 사이에 전해지고 암송됨으로써 명성이 전파됐다. 또한 ‘대학장구(大學章句)’와 ‘동몽수지(童蒙須知)’ 등을 주석했다.

1565년 다시 괴산으로 이배됐다가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풀려나와 교리(校理)에 기용되고 이어 대사간과 부제학, 대사헌, 이조판서, 대제학 등을 지냈다. 1573년(선조 6년) 우의정, 1578년 좌의정을 거쳐 1585년에는 영의정에 이르렀다.

1588년 영의정을 사임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됐으나 이듬 해 10월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과거에 정여립을 천거했다는 이유로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고 파직됐다.

그는 온유하고 원만한 성격으로 인해 사림의 중망을 받았으며 특히 선조의 지극한 존경과 은총을 받았다. 그의 덕행과 업적의 성과는 매우 다양해 왕과 백성들, 그리고 많은 동료들에게 영향을 줬다. 그가 진도에 귀양 갔을 때 그 섬 풍속이 본시 혼례라는 것이 없고 남의 집에 처녀가 있으면 중매를 통하지 않고 칼을 빼 들고 서로 쟁탈했다. 이에 예법으로써 섬 백성들을 교화해 마침내 야만의 풍속이 없어졌다.

그는 또 아버지 상을 당했을 때 대상(大祥) 후에 바로 흑색의 갓을 쓰는 것이 죄송하다고 생각해 국상(國喪) 때와 같이 백포립(白布笠)을 쓰고 다녔다. 그 뒤 직제학정철(鄭澈)이 이를 본받아 실행했고 뒤에 교리신점(申點)이 주청해 담제 전에는 백포립을 쓰도록 제도화시켰다.

봉산서원 전경
△봉산서원.

봉산서원은 1868년(고종 5년) 무진(戊辰)년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이 내려지자 안타깝게 훼철(毁撤)됐다. 1923년 계해(癸亥)년 사림(士林)의 중론(重論)에 의해 설단 단향(設壇 壇享)해 오다가 영남유림(嶺南儒林)의 발의(發議)로 복원공사(復元工事)를 했다. 그로부터 50여 년이 흐른 1977년 정사(丁巳)년에 묘우(廟宇)를 준공(竣工)하고 봉안고유(奉安告由)하여 서원향사를 지내오다가 2004년 갑신(甲申)년에 정부의 지원을 받아 묘우를 기존의 위치에서 조금 뒤에 새롭게 건립했다. 이어 2009년 기축(己丑)년 봄에 강당을 준공해 서원의 면모를 새롭게 했으며 묘호(廟號)는 경현사(景賢祠)다.

특히 봉산서원은 오랜 유배생활 가운데서도 학문에 대한 열정을 꽃피운 소재 선생님을 모신 곳이다. 소재 선생은 유배지에서도 오롯이 공자의 논어와 함께 두보의 시를 읽고 또 읽어 횟수가 2000번에 이르렀으며 ‘만 권의 책을 읽은 후 붓을 들면 신들린 듯 글을 지을 수 있다’고 한 두보의 말처럼 두보의 시혼을 자신의 붓 속에 불어 넣었는데 소재의 시는 생활이며 시대라는 평을 받았다.

또한 소재 선생의 삶은 ‘효제(孝悌)’라는 두 글자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부모를 잘 섬기고(효도하고) 어른을 잘 섬기는(공경하는) 일이 바로 효제다. ‘효제부(孝悌賦)’를 지어 자신의 인생관을 밝혔으며 전 생애에 걸쳐 효제를 실천했다. 대대로 이어져 오고 있는 소재 종가를 비롯한 후손들은 그 뜻을 받들어 ‘효제’를 실천하는 길을 그대로 따라 걷고 있어 주목된다.

진덕문
△진덕문.

연못의 옆 길을 따라 서원의 진덕문(進門德)을 열고 들어서면 깔끔하게 정돈된 여러 건물을 만난다. 경현묘(景賢廟)와 선교당(宣敎堂), 5칸의 재소(齋所), 4칸의 고사(庫舍)와 봉산지부도신도비(鳳山池浮島神道碑), 봉산지사적비(鳳山池史蹟碑), 하마비(下馬碑) 등이다.
심문재
중앙에는 강당인 선교당(宣敎堂)과 왼쪽에는 명변재(明辨齋) 오른쪽에는 심문재(審問齋)가 자리하고 있다. 서원 오른쪽 안에 묘우인 경현사가 엿보인다.

선교당
명변제
△선교당.

선교당(宣敎堂)은 근래에 건축된 강당 이름으로 현판이 마루 안쪽 가운데에 있다.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돼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등에 사용되며 명변재와 심문재 역시 강당과 같은 형태로 돼 향사 때 제관과 유생들이 숙소로 사용하고 있다. 고사는 향사 때 제수(祭需)를 마련해 두는 곳이며 고자들이 거처하는 곳이기도 하다.

경현묘
△경현묘.

경현묘(景賢廟)는 서원 묘우의 이름으로 현판이 정면 처마에 걸려 있다. 강당 뒤쪽에 돌계단을 올라 서원이 위치한 자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며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맞배지붕이다. 원래의 묘우가 협소해 강당 뒤편으로 옮겨 세웠다고 한다.
신도비
서원 앞에는 고려 말에 길이 2290척의 규모로 축조했다고 전해지는 못이 있다. 그 중앙에 있는 섬을 ‘봉산지부도’라 하며 신도비는 허목(許穆)이 노수신에 관해 지은 것이다. 안에는 66㎡ 기량 되는 섬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 섬을 뜬 섬 또는 ‘부도(浮島)’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섬은 신기하게도 한 해에 한 번씩 자리를 옮겼는데 동쪽으로 가면 흉년이 들고 서쪽으로 가면 풍년이 든다는 말이 있다. 한말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우연히 ‘부도’가 사라졌다고 한다.

오현영정
△오현영정.

오현영정(五賢影幀)은 소재 선생의 외조부 이자화(李自華)가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가져온 영정으로 ‘주자학’을 학문으로 정립한 송대의 오현(五賢)이 배치돼 있다. 소재 선생께서는 책을 읽을 때면 늘 이 영정을 마주했으며 진도의 유배지에서도 변함이 없었다고 한다. 이 영장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8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기영회도.

기영회도(耆英會圖)는 1585년 7월에 소재 선생 등 70세가 넘는 정 2품 이상의 문신들을 예우하기 위해 연 기영회의 모습을 그린 기록화다. 기영회는 국가에서 노인을 공경하고 예우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행사였다. 기영회도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9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한편 봉산서원은 현재 남아 있는 다른 서원의 역할이 많이 쇠퇴한 것처럼 마찬가지다. 하지만 매년 3월 중해(中亥)에는 향사를 지내고 있다. 향사 홀기에 따르면 향사 전날 유사는 서원 내외를 청소하며 제기를 씻는다. 희생이 서원 문밖에 도착하면 제관들이 복장을 갖추고 부엌에 가서 깨끗이 하는 것을 살펴보고는 처소로 들어가 제향에 대한 연습을 한다. 유사는 헌관의 자리를 묘우 중간에 북면해 안배하며 서쪽을 상석으로 삼는다. 제관의 자리는 뒤에 차례로 마련한다.

서원에는 오현영정(五賢影幀)과 십청헌시첩(十靑軒詩帖), 기로연도(耆老宴圖) 등의 유물이 소장돼 있고 문헌으로는 ‘인심도심변(人心道心辨)’ 등 약간의 책들이 있다.



□봉산서원 배향 선현

△심희수(沈喜壽)

선생(先生)의 자(字)는 백구(白懼), 호(號)는 일송(一松) 또는 빙설(氷雪)이며 본관(本貫)은 청송(靑松)으로 심건(沈鍵)의 자(子)이다. 1527년(선조 5) 문과급제(文科及第), 호당(湖堂)에 뽑혔으며 임진왜란(壬辰倭亂)에 호가(扈駕)해 도승지(都承旨)가 되고 이어 대사헌(大司憲), 형조판서(刑曹判書),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역임(歷任)했으며 명(明)의 접반사(接伴使)로 서도(西道)에 오래 머물렀다. 그 후 대사헌(大司憲), 이조판서(吏曹判書),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역임하고 좌우찬성(左右贊成)을 거쳐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고 좌의정(左議政)으로 영창대군(永昌大君)을 해(害)하려 하자 이덕형(李德馨)과 함께 반대(反對)해 재임시 정인홍 등이 사퇴(辭退)하고 둔지산(芚之山)에 은거(隱居)했다. 1615년 영돈영부사(領敦寧府事)가 되고 시호(諡號)는 문정(文貞)이다.

△성윤해(成允諧)

선생(先生)의 자(字)는 화중(和仲)이며 호(號)는 판곡(板谷)이고 본관(本貫)은 창녕(昌寧)으로 성근(成近)의 자(子)이다. 원통산(圓通山) 아래에 집을 짓고 서책(書冊)과 자연(自然)에 묻혀 일생(一生)을 보냈으며 만년(晩年)이 된 1583년(선조 16) 이이(李珥), 정지연(鄭芝衍), 이후백(李後白)등의 천거(薦擧)로 왕자사부(王子師傅), 태인현감(泰仁縣監)이 제수(除授)됐으나 모두 불취(不就)했다. 조헌(趙憲)의 상소(上疏)에 숨은 선비 중에 언론(言論)과 풍지(風旨)가 바르고 굳센 최고의 인물이라고 평가됐다.

△김홍미(金弘微 : 1557-1604) (明宗12-宣祖37)

선생(先生)의 자(字)는 창원(昌遠), 호(號)는 성극당(省克堂)이며 본관(本貫)은 상산(商山), 김범(金範)의 아들이다. 조식(曺植)과 류성룡(柳成龍)의 문인(門人)으로 1579년(선조 12) 진사(進士)가 되고 1585년(선조 18) 식년문과 을과(式年文科 乙科)에 급제(及第)해 승문원 부정자(承文院 副正字)에 발탁돼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 저작(著作),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등을 거쳐 부수찬(副修撰)을 역임했으며 당시 백씨(伯氏)인 홍민(弘敏)과 함께 사림(士林)으로 영예(榮譽)를 누렸다. 이조좌랑(吏曹佐郞)으로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謀叛事件)에 연루돼 파직(罷職)되기도 했다. 그 뒤 복관(復官)돼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시작될 무렵에는 경상좌도 도사(慶尙左道 都事)가 되고 이어 교리 겸 시강원문학(校理 兼 侍講院文學)을 거쳐 이듬해 경연관 응교(經筵官 應敎), 사간(司諫), 사성(司成) 등을 역임하다가 관직을 사퇴햇다. 그 이듬해 다시 청송부사(靑松府使)를 거쳐 1604년(선조 37) 강릉부사(江陵府使)로 이듬해 수해(水害)를 복구(復舊)하다가 병환(病患)으로 관직(官職)을 사퇴(辭退)했다.

△조우인(曺友仁 : 1561-1625) (明宗16-仁祖3)

선생(先生)의 자(字)는 여익(汝益), 호(號)는 매호(梅湖) 또는 이재(?齋)이며 본관(本貫)은 창녕(昌寧)으로 우부승지 조계형(右副承旨 曺繼衡)의 증손(曾孫)이다. 1588년(선조 21)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해 진사(進士)가 되고 1605년(선조 38)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해 여러 벼슬을 지내다가 1616년(광해군 8) 함경도 경성판관(咸慶道 鏡城判官)을 지냈다. 1621년(광해군 13)에는 제술관(製述官)으로 있으면서 서궁(西宮)의 황적유폐(荒寂幽閉)함을 보고 감회(感懷) 일장(一章)을 지어 필화(筆禍)를 입고 3년간 옥고(獄苦)를 치르고 인조(仁祖)의 등극으로 풀려나 상주(尙州)의 매호(梅湖)에 은거(隱居)하면서 여생(餘生)을 마쳤다. 시(詩), 서(書), 음악(音樂)에 뛰어나 삼절(三絶)이라 평(評)하였다. 선생(先生)의 가사(歌詞)집 이재영언(?齋詠言)에는 <(매호별곡(梅湖別曲)>, <관동속별곡(關東續別曲)>, <자도사(自悼詞)>, <출새곡(出塞曲)>등 4편의 가사작품이 실려 전한다. 매호별곡(梅湖別曲)은 1624년경 노경(老境)에 은거(隱居)하던 사벌면 매호리에서 자연을 벗하며 한가롭게 은일사(隱逸士)의 정경(情景)을 노래한 것으로 국문학사에서 가사문학의 귀중한 자료로 전해지고 있다.

△정호선(丁好善 : 1571-1632) (선조4-인조10)

선생(先生)의 자(字)는 사우(士優)이고 호(號)는 동원(東園)이며, 본관(本貫)은 나주(羅州), 대사헌 정윤복(大司憲 丁胤福)의 아들이다. 1601년(선조 34) 진사(進士)가 되고 이 해에 식년문과 을과(式年文科 乙科)에 급제(及第)하여 이조정랑(吏曹正郞), 직강(直講), 사예(司藝), 전적(典籍), 지평(持平), 정언(正言), 수찬(修撰), 응교(應敎) 등을 역임, 1609년(광해원년) 승문원 판교(承文院 判敎)로 춘추관(春秋館), 편수관(編修官)을 겸(兼)해 선조실록(宣祖實錄) 편찬(編纂)에 참여했다.

1611년(광해군 3) 장령(掌令), 사간(司諫)을 거쳐 강원관찰사(江原觀察使)로 부정(不正)을 범한 춘천부사(春川府使)와 양양현감(襄陽縣監)을 파직(罷職)시켜 지방의 관기(官紀)를 바로 잡았다. 1616년(광해군 8) 사인(舍人)으로 천추사(千秋使)가 돼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당시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 영창대군(永昌大君)이 죽고 인목대비 폐모론(仁穆大妃 廢母論)이 대두돼 정세가 크게 혼란하자 상주목사(尙州牧使)로 나가면서 신병(身病)을 빙자(憑藉)해 은퇴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다시 기용돼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파수대장(把守大將)으로 좌도(左道)의 병사(兵士)를 거느리고 죽령(竹嶺)에 진(陣)을 쳤다가 강화(講和)가 성립되자 철수하고 이듬해 병(病)으로 사임했다.

△황익재(黃翼再 : 1682-1747) (숙종8-영조23)

선생(先生)의 자(字)는 재수(再?)이며 호(號)는 백화재(白華齋)이다. 본관(本貫)은 장수(長水), 좌승지 황진하(左承旨 黃鎭夏)의 아들이다. 1702년(숙종 28)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及第)해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가 되고 박사(博士), 병조좌랑(兵曹佐郞)을 거쳐 평안도 도사(平安道 都事)를 지냈다. 1709년(숙종 35) 전라도 도사(全羅道 都事)에 재직할 때는 조세(租稅)의 조운과정(漕運過程)에서 발생하는 폐단(弊端)을 엄격히 단속했고 1711년(숙종 37) 무안현감(務安縣監)으로 있을 때는 거듭된 흉년으로 피폐해진 농민의 구휼(救恤)에 힘썼다. 어사 홍석보(御使 洪錫輔)가 선생의 치적(治績)을 조정(朝廷)에 주달(奏達)해 포상(褒賞)이 내려지고 나주조운군(羅州漕運軍)의 통솔권(統率權)을 받았다. 그 뒤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영광군수(靈光郡守)를 거쳐 1728년(영조 4) 통정(通政)에 올라 종성부사(鍾城府使)가 됐다. 이때 이인좌(李麟佐)의 난(亂)에 모함을 받아 유배(流配)됐다가 7년 뒤인 1736년(영조 12) 사면(赦免)돼 복직(復職)의 명(命)을 받았으나 사양(辭讓)하고 낙향(落鄕)해 향리(鄕里)에서 성리학연구(性理學硏究)와 후진양성(後進養成)에 전념(專念)했다.

김성대 기자
김성대 기자 sdkim@kyongbuk.com

상주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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