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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병진 경주지역위원회 위원
경북 경주시 현곡면 나원리 676번지의 오층석탑. 어린 시절 할머니께서 들려주신 이야기가 늘 생각난다.

“옛날 옛적에 나원리에 한 부유하면서 학덕이 높은 귀족이 있었다. 제자들을 가르치고 후한 인심을 베풀어 고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나 슬하에 아들 하나를 두고 부인이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참한 여인을 재취로 맞아 아들과 딸을 낳아 다복하게 살았다. 그러나 재취로 들어온 새어머니가 재산과 지위를 자신의 자식에게 물려주기 위해 전처 아들을 남편 몰래 구박하고 모함해 결국은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나중에 이 사실은 안 아버지가 후처와 그 자식들을 징벌한 뒤 가산을 정리해 절과 탑을 세웠다. 그 뒤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면서 탑의 색깔이 변하면 내가 죽은 줄 알고 색이 변하지 않으면 살아있을 것이라 말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갔다는데 아직까지 탑의 색깔이 변하지 않고 백탑으로 있다”는 식의 이야기였다.

콩쥐 팥쥐 이야기와 오버랩 되면서 기억에 남았었는데 아무리 자료를 찾아보아도 찾을 수 없었다.

아마 신라 팔괴(八怪)의 하나인 나원 백탑(白塔)에 갖다 붙인 권선징악적인 이야기이리라.

나원백탑(羅原白塔)은 경주시 현곡면 나원리에 소재하는 통일신라 초기의 오층석탑으로 국보 제39호이다.

경주에 있는 석탑 가운데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국보 제112호)과 고선사지 삼층석탑(국보 제38호)에 버금가는 큰 규모를 자랑한다.

천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순백의 빛깔을 간직하고 있는데, 이 때문에 ‘나원 백탑(白塔)’이라 불리고 남산부석, 계림황엽, 금장낙안, 불국영지 등과 함께 신라 팔괴(八怪)의 하나에 속하는 탑이다.

2층 기단(基壇)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으로, 기단과 1층 탑신의 몸돌, 1·2층의 지붕돌을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기단은 면마다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겼는데, 가운데 조각을 아래층은 3개씩, 위층은 2개씩 두었다. 탑신 부는 각 층 몸돌의 모서리에 기둥 모양의 조각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경사면의 네 모서리가 예리하고 네 귀퉁이가 살짝 들려있고, 밑면에는 5단씩의 받침을 두었다.

꼭대기에는 부서진 노반(露盤·머리 장식 받침)과 잘려나간 찰주(擦柱·머리 장식의 무게중심을 지탱하는 쇠꼬챙이)가 남아있다.

짜임새 있는 구조와 아름다운 비례를 보여주고 있어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경에 세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주에서는 보기 드문 5층 석탑으로, 탑이 지니고 있는 듬직한 위엄에 천 년이 넘도록 이끼가 끼거나 색이 바래지 않고 순백색을 띠고 있어 나원백탑으로 불려왔다.

순백의 화강암이 주는 맑은 기품에 전체적으로 매끈하고 날렵한 마감처리로 부드럽고 편안한 느낌이 들어 경건한 신심을 불러일으키는 탑이다.

1995년 말부터 1년여 해체 수리를 진행했는데 3층 옥개석 윗면의 사리공에서 사리함과 금동소탑, 금동소불 등의 사리장엄구가 발견됐으며 대부분 몸돌 상부에 사리공을 마련하는 데 비해 지붕돌 상부에 사리공을 만든 것이 매우 특이한 점이라고 한다.

어렸을 때 들은 할머니 이야기에다 내 고장 유일의 국보인 나원백탑에 긍지를 느끼며 살아왔는데 국보로서의 대접이 소홀한 것 같아 섭섭하다.

도로 표지판이 제대로 설치돼 있지 않아 경주 도심에서 찾아가기가 쉽지 않다.

우선 큰 버스는 아예 진입할 수 없고 승합차도 겨우겨우 바퀴 빠지는 걸 걱정하며 솜씨 운전을 해야 들어갈 수 있다.

진입로의 조속한 확장과 직선화가 필요한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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