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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예쁘니?”라고 백설공주의 계모인 왕비가 묻습니다. “그야 물론 눈부시게 하얗고, 깊이를 모를 정도로 까맣고, 하늘의 태양처럼 빨간 백설공주죠!”, 거짓말을 모르는 거울은 그렇게 대답합니다.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예뻐야만 했던 왕비는 제어할 수 없는 질투심에 몸 둘 바를 모릅니다. 사냥꾼을 불러서 살인을 청부합니다. 증오가 얼마나 깊었던지 살인의 증거물까지 꼭 가져오라고 명합니다. 사냥꾼이 가져다준 가짜 증거물, 멧돼지의 간과 허파를 왕비는 우걱우걱 먹습니다. 옛날이야기들이 보통 이렇게 끔찍합니다. 좋게 말하면 나이브하게 인간의 욕망을 묘사하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인간이란 족속이 본디 끔찍한 것들이라는 것을 실감 나게 알게 해주는 게 옛날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요즘 신문 방송을 가득 채우고 있는 기사들을 보면 그런 이야기가 꼭 나쁜 것이라고만 할 수도 없겠습니다. 나라 안이든 나라 밖이든 온통 끔찍한 이야기로 넘쳐나는 걸 보니 그런 생각이 듭니다.

‘백설공주’에 나오는 왕비의 거울로 돌아가겠습니다. 거짓말을 모르고, 무엇이든 알아맞히는 신통력을 가진 그녀의 거울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①왕비의 염려(무의식이 반영된), ②세상의 중론(여론), ③이야기의 재미를 더하기 위한 문학적 장치 등으로 유추해 볼 수 있겠습니다. ①의 경우는 거울이 왕비의 불안이라는 것입니다. 도전자로 인한 불안, 그것에 대한 책임을 거울에게 전가하고 자신은 빠지려는 회피심리로 해석합니다. 이를테면 며느리를 들이는 일이 불안한 예비 시어머니가 점집을 찾아다니며 “사주(궁합)가 좋지 않다”라는 ‘운명적 계시’를 수집하는 것과 같은 심리입니다. 그때 왕비(시어머니)들이 즐겨 쓰는 수사가 있습니다. “용하다는 점집 두 군데를 골라서 봤는데 두 집 다 안 좋게 나오더라”입니다. 그런 말(거울의 말)을 주변에 퍼뜨리면서 자신의 불안을 무마하려합니다. ②는 ①과는 반대 입장입니다. 여론의 부정적 기능을 강조합니다. 공연히 사람들이 “백설공주가 예쁘다”라는 말을 퍼뜨리면서 왕비의 질투심에 불을 지르는 것입니다. 여론이 사람을 잡는 것은 예나제나 변함이 없습니다. ③은 거울을 이야기가 본디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장치 중의 하나로 보는 입장입니다. 이야기에는 갈등이 존재해야 합니다. 거울은 왕비와 백설공주 사이에 갈등이 존재하게 만들어주는 중개자가 됩니다. 중요한 인물(성격)입니다. 백설공주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말해서 왕비의 질투심에 불을 지르고(갈등 유발), 나중에는 백설공주가 아직 죽지 않았다고 고자질해서 갈등을 계속 연장시키는 것이 바로 거울의 역할입니다. ‘백설공주’라는 이야기를 재미있는 게 만드는 일등 공신이 바로 이 캐릭터입니다. 위와 같이 볼 수 있다면, 왕비의 거울은 사실 하나가 아니라 ‘세 개의 거울’이었던 셈입니다.

문학교사라는 직업상 처세(사회화)를 알고, 진리(지혜)를 찾고, 윤리(정체성)를 구하는 책들과 오랜 기간 함께 해 왔습니다. 나이가 드니 그것들이 각각 다른 것들이 아니라 모두 하나라는 것을 알겠습니다. 무엇을 읽든 책은 제 자신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그 거울들에 비친 지금 제 안팎의 모습이 어떨지가 궁금합니다. 그래서 저도 ‘세 개의 거울’을 제 앞에 걸어 놓고 그것들을 향해서 왕비가 했던 것처럼 “이 세상을 어떻게 사는 게 아름답고, 옳고, 마땅한 것이니?”라고 한 번 물어볼 작정입니다. 예비 작업으로 그동안 제가 사용한 거울들을 한 번 점검해 봅니다. 몇 년에 걸쳐서 써온 것들 중에서 몇 편 골라서 살펴보니 참 가관입니다. 너무 작은 거울, 너무 큰 거울, 금간 거울, 깨진 거울, 뚱뚱이 거울, 홀쭉이 거울, 못난이 거울, 예쁜이 거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거울이 없습니다. 일모도원(日暮途遠),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머니 그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절차탁마(切磋琢磨)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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