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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제 이름이 싫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남자 이름에 착할 ‘선(善)’자가 들어가는 게 싫었습니다. 그럴듯한 포부도 없고 주술적인 반어(反語)도 없고 하다못해 그 흔한 완력도 없는, 그저 “착하게 살자”라는 소시민적인 다짐이 싫었습니다. 사실 그런 식의 제 이름에 대한 불만에는 배후가 따로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작명 후일담이 그것입니다. “위로 세 명 이름을 짓고 나니까 특별히 생각나는 게 없더라. 그래서 그냥 막내는 착하게나 살아라 하고 착할 선을 넣었지”라고 언젠가 말씀하셨습니다. 어린 마음에 공연하게 박대받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제 이름에 대한 내심의 홀대가 시작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십대 후반에 ‘오늘의 작가상’을 받고 소설가가 되면서 결정적으로 한 번 이름을 바꿀 기회가 있었습니다. 행사를 주관하던 출판사에서 이름을 한 번 바꾸어 볼 것을 권했습니다. 시인 작가들이 필명(筆名)을 쓰는 것은 오래된 관습입니다. 이상이나 백석 같은 유명한 시인들이 본명이 따로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그 무렵에 문명(文名)을 떨치던 한 소설가도 외자인 이름에 문(文)자를 첨가하여 필명으로 삼았다고도 했습니다(이름값도 크다고 했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게 필명을 권하는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제 이름이 작가의 이름으로는 좀 촌스럽다는 것이고 둘째는 당시 제 신분이 군인이었던 관계로 일종의 위장막으로 별도의 이름을 하나 가지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본명에 약간의 변화를 주거나(이를테면 이름자 중 어느 하나를 ‘문’이나 ‘철’ 같은 자로 대체) 아예 전면적인 교체를 시도해 보는 게 어떻겠냐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이 많이 동했습니다. 당시 가까운 문우 중에서도 월리나 지월 같은 멋있는 필명을 가진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참에 그 대열에 합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실패했습니다. 지금이라면 아예 성까지 다 바꾸는 대공사도 한 번 해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때는 그런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제 성(姓) 자체가 멋있는 필명하고는 거리가 좀 멀다는 비관적인 느낌만 받았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소심하게 물러난 것이 지금도 후회가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다 지난 일, 이름(명분)에 대한 공자님의 말씀을 떠올리면서 그동안의 섭섭했던 마음을 달래봅니다.

... 자로가 묻기를 <만약 정치를 하신다면 선생님께서는 무엇부터 먼저 하시렵니까?>라고 하니, 선생님은 <반드시 이름을 먼저 바로잡을 것이다...(중략)...이름이 바르지 못하면 말의 논리가 바르지 못하고 말의 논리가 바르지 못하면 일이 성사되지 않는다. 일이 성사되지 않으면 예악이 일어날 수 없고 예악이 일어나지 않으면 형벌이 정당하게 적용되지 않는다. 형벌이 정당하게 적용되지 않으면 백성들이 수족을 어떻게 두어야 좋을지 모르게 되는 것이니, 그러므로 군자는 사물의 이름을 부를 때에는 반드시 말이 될 수 있게 하고, 말을 할 때에는 반드시 이를 실천할 수 있게 한다. 군자는 어떠한 말에 있어서도 구차하게 억지로 갖다 붙이지 않도록만 하면 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論語’ ‘子路’’

“구차하게 억지로 갖다 붙이지 않도록만 하면 된다”라는 공자님의 말씀을 아버지가 제 이름을 지을 때의 심정에 빗댄다면 지나친 억측일까요? 이 글을 쓰는데 마침 TV에서 고위공직자 인사청문회 상황과 청와대 대변인 사퇴 소식을 전하는군요. “구차하게 억지로 갖다 붙이지 않도록만 하면 된다”라는 공자님의 말씀을 무색케 하는 온갖 공허한 말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모두 이름을 먼저 바로잡지 못한 탓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름값 하기가 그렇게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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