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 건 상소로 임금께 직언…대쪽같은 선비의 기상 오롯이
역동이라는 서원의 명칭은 우탁이 주역을 해득하여 강학한 것을 기념하여 퇴계가 붙인 이름이다.
춘산(春山)에 눈 녹인 바람 문득 불고 간데없다.
잠깐만 빌어다가 머리 위에 불게 하고 싶구나.
귀밑에 해묵은 서리를 녹여볼까 하노라.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려 하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늙지 않으려고 다시 젊어보려 하였더니
청춘이 날 속이고 백발이 거의로다.
이따금 꽃밭을 지날 때면 죄지은 듯하여라.
우탁이 남긴 세 수의 시조는 흔히들 ‘탄로가(嘆老歌)’로 불린다. 탄로가는 고려 충선왕의 패륜을 극간하다가 벼슬을 버리고 안동 예안에 은거해 학문을 닦던 역동이 어느덧 백발이 되어버린 자신의 노화를 안타까워하며 읊은 노래다. 역동이 남긴 시조는 실제 세 수지만, 역동서원과 예안면 정산리에 있는 재실 앞 시비에도 두 수만이 새겨져 있다.
△우탁과 역동서원.
역동서원은 안동 지방에서 가장 먼저 창건된 서원이다. 퇴계 이황의 발의의 따라 1570년 선조 3년에 예안면 부포리 오담에 세워줬다. 지방 유림들이 우탁 선생의 학문적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선조 3년(1570)에 서원에 위패를 모셨다.
이후 숙종 10년(1684)에 사액서원으로 지정됐다. 그러나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을 피하지 못해 훼철됐다가 1969년 복원됐다. 서원의 옛터인 ‘지삼의’는 안동댐의 건설로 수몰되었으며, 현양사의 전당이 창건됐던 역동 그 자리에 이건된 유허비는 경북도유형문화재 제30호로 지정됐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상현사, 8칸의 명교당, 신문(神門), 입도문, 1칸의 전사청, 1칸의 장서각, 10칸의 주소 등이 있다. 사우인 상현사에는 우탁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단양 출신인 그가 경상도와 인연을 맺은 건 1290년 문과에 급제해 영해 사록으로 부임하면서다. 그는 영해에 요괴한 신사(神祠)가 있어 백성들이 현혹되는 것을 보고 이를 철폐하고 백성들을 교화했다. 그의 강직함은 이른바 ‘지부(持斧) 상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
충선왕이 선왕인 충렬왕의 후궁과 밀통하자 그는 흰옷에 ‘도끼를 들고’ 거적을 메고 대궐에 입궐하여 상소했다. 신하들이 왕의 노여움을 두려워하여 상소문을 펴들고 감히 읽지 못하니 “왕을 모시는 신하로서 그릇된 점을 바로 잡지 못하고 악으로 인도하여 지금에 이르니 경은 그 죄를 아느냐”고 일갈했다.
그 후 왕이 자신의 간언을 듣지 않자 관직을 물러나 안동 예안에 은거하여 학문을 닦고 후학들을 가르쳤다. 충숙왕은 역동의 충의를 높이 사 여러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오로지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다가 1342년(충혜왕3)에 생을 마쳤다. 시호는 문희공이다.
조선조에 들어와 역동의 학문과 덕행을 흠모하였던 퇴계 선생이 주창하여 구택 근처에 역동서원을 창건했다. 그 뒤 역동의 본향인 단양에 단암서원, 최초의 사관지였던 영해에 단산서원, 그리고 안동에 구계서원 등이 창설되어 향사했다.
역동이 제자들을 가르친 마을을 도학, 예의, 절조의 세 가지를 가르친 곳이라고 세상 사람들이 ‘지삼의(知三宜)’라 불렀다. 그러나 이 마을(예안면 선양리)은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었으니 역동의 흔적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역동 우탁은 한국 성리학의 역사를 열어나간 선구자였고, 특히 역학의 대가로 추앙받았다. 또 그는 농암 이현보, 퇴계 이황을 중심으로 한 향토시가의 유풍에도 영향을 미쳐 이 지역 최초의 시조작가로서 소중한 업적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