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원.jpeg
▲ 이재원 화인의원 원장
‘거리의 철학자’라는 별칭을 지닌 김상봉 교수는 우리 사회를 ‘학벌사회’라고 규정한 바 있다. 그의 정의에 따르면 학벌사회란 일류대학 진학 목표가 만연한 사회를 말한다. 그는 자신의 저서 ‘학벌사회’를 통해 서울대를 정점으로 하는 학벌서열을 타파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사회문제는 물론 왜곡된 교육 현실을 바로 잡을 수 없다며 서울대 학부 폐지와 국공립대 평준화를 주장했다. 책이 처음 출판된 당시(2004년)엔 주장하는 내용 자체가 너무도 파격적이어서 많은 논란도 있었지만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정확히 짚었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론 무척 공감이 됐었다.

얼마 전 일류대 의대에 자녀를 입학시키려는 우리나라 상류층 학부모들의 빗나간 자식 사랑을 다룬 드라마가 시청자들로부터 큰 반향을 일으킨 적이 있다. 피라미드 구조를 닮은 한국사회에서 상층부에 오르기 위해선 명문대 진학만이 유일하다고 믿는 극 중 학부모들이 오로지 공부만을 외치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시청자들은 지금의 우리 교육 현실을 개탄스러워 했다. 하지만 드라마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와는 달리, 실제로는 입시학원가 중심으로 극 중 등장인물을 닮은 소위 잘나가는 ‘입시 코디네이터’에 대한 인기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져 극 중 결말과는 상반된 현상이 벌어졌다.

지난달 31일 한국교육개발원이 발표한 ‘2018 교육여론조사’ 분석 결과에 따르면 월 소득 600만 원 이상인 응답자들의 38.2%가 ‘대학입학 전형에 가장 많이 반영돼야 할 항목’으로 ‘대학수능시험 성적’을 꼽았다. 그다음으로 ‘특기·적성’(21%), ‘인성 및 봉사활동’(20.5%) 등이 차지했다. 소득이 400만 원 이상에서 600만 원 미만인 응답자 역시, 수능성적(29.7%)을 가장 많이 선택한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월 소득 200만 원 이상~400만 원 미만인 응답자는 수능성적(23.6%)보다는 특기˙적성(30.4%)을 그리고 인성·봉사활동(23.9%)을 우선적으로 선택했다. 200만 원 미만의 월 소득자 또한 특기·적성(28.6%)을 대입전형에 최우선으로 반영해야 된다고 응답한 것으로 조사됐다. 한마디로 사교육비가 부담이 되지 않는 고소득층일수록 사교육의 효과가 즉각적인 수능성적을 대입전형의 우선순위로 꼽은 것이다.

교육부가 통계청과 함께 실시한 ‘2018년 초·중·고 사교육비 조사’결과를 보면 우리나라 초·중·고 전체 학생의 72.8%가 사교육에 참여하고 있으며 한 해 동안 지출한 사교육비는 총 19조5천억 원인 것으로 나타났다. 즉, 2018년 기준 학생 10명 중 7명 이상은 사교육을 받고 있으며 일 인당 평균 29만 원 이상을 사교육비로 지출했다는 얘기다. 특히 연간수입 200만 원 미만의 저소득층 가구 자녀들의 47.3%가 사교육에 참여하고 있는 데 반해 연 수입 800만 원 이상의 고소득층 자녀의 사교육 참여율은 84%를 기록, 빈부 격차에 따른 자녀 사교육 참여율이 크게 차이가 나는 것으로 조사됐다. 늘 그렇듯 이 같은 조사결과가 나오자마자 공교육 활성화와 대입제도 개선에 대한 요구의 목소리가 어김없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하지만 사교육 문제가 우리사회의 심각한 병폐현상 중 하나가 된 지 오래고 그동안 정권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대입제도가 도입되곤 했지만 사교육 문제가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악화되었던 게 사실이다. 고질적인 사교육 문제가 결코 잘못된 입시제도 때문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오히려 우리 사회 곳곳에서 여전히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성적만능주의가 더 큰 문제라고 보는 것이 옳다.

사회적 불평등은 부의 독점에서 비롯되지만 무엇보다 그 이면에는 권력독점이 자리 잡고 있다. 성적이 곧 능력으로 치부되고 학벌로 인한 권력독점이 지속되는 한 사회적 불평등은 결코 해소될 수 없으며 피라미드 꼭대기에 오르기 위한 사교육 열풍은 절대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다.

김상봉 교수는 ‘성적이 좋은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자연스런 도덕적 판단능력을 상실한 사람들의 머릿속에서나 가능한 병적인 발상’이라며 우리 사회의 학업성적 만능주의를 비판했다. 배울 만큼 배웠다는 정치 엘리트들이 일반인의 사고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역사의식을 드러내고 알 수 없는 궤변을 늘어놓는 것을 보면 충분히 수긍이 가고도 남는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