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문제도 정면거론…'日자발조치' 겨냥 메시지인듯
이승만이후 역대 정권으론 처음…'과거사' 새 국면

한일관계에 엄청난 파란이 예고되고 있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1일 제86주년 3.1절 기념사를 통해 양국 관계발전에서 일본 정부와 국민의 노력을 지적한 뒤 "과거의 진실을 규명해서 진심으로 사과하고 배상할 일이 있으면 배상하고, 그리고 화해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은 물론 "양국관계의 진전을 존중해 과거사 문제를 외교적 쟁점으로 삼지 않겠다고 공언했고 이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고 말했으나, 양국 관계에서 가장 예민한 '아킬레스건'을 정면으로 거론함으로써 외교문제로 비화될 전망이다.

특히 2005년은 한일수교 40년일 뿐아니라 '한일 우정의 해'로서 양국은 새로운 차원의 관계 정립을 모색하기 시작했으나, 일본 시마네현 의회의 '독도의 날' 제정 조례 제출에 이어, 다카노 도시유키(高野紀元) 주한일본대사의 '독도는 일본땅' 망언으로 상당히 그 의미가 퇴색했으며 이번 노 대통령의 3.1절 기념사 발언을 계기로 양국 관계는 다시 한번 본격적으로 과거사 문제를 다뤄야 하는 국면으로 접어든 느낌이다.

양국간 외교문제로 비화될 가장 핵심 쟁점은 노 대통령이 언급한 '배상'이다.

과거 이승만 정권 이후 한일 과거사 청산과 관련해 '배상'이라는 용어를 공개적으로 정면 거론한 것은 노 정권이 처음이다.

'배상'이란 기본적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를 '불법행위'로 파악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고, 그 불법행위로 인한 정신적, 육체적, 물질적 피해의 보상을 뜻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당면한 징용.징병 등 일제하 강제동원 피해자와 종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는 물론, 식민지 지배에 따른 모든 피해가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노 대통령이 언급한 '배상'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 따른 '개인보상청구권' 개념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으며, 더더구나 일본 정부가 협상당시 청구권 자금 명목으로 내세웠던 '한국의 독립축하금'이니 '경제협력 자금'과는 완전히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라는 점에서도 파란이 예상된다.

그러나 이날 노 대통령의 '배상' 발언이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의 재협상을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국내 일각에서 재협상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한일협정은 두 나라 정부간에 맺은 협정인 만큼 한국의 정부가 당시와 달라졌다고 해서 기존의 협정을 다시 협상하자고 하는 것은 국제사회의 신뢰를 고려할 때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의 이날 발언 역시 우리 정부가 일본 정부를 상대로 '배상' 문제를 공식으로 제기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 아니라, 일본 정부와 국민 '스스로' 과거의 진실을 '진지하게' 규명해 그에 맞게 배상의 조치를 취하라는 주문으로 보인다.

한일협정의 재협상 측면에서라기 보다는 일본 정부와 국민의 '도덕적 자기반성'과 그에 따른 적절한 후속조치를 촉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문제 외에도 노 대통령은 일본측이 '아파할' 몇 가지 부분을 지적했다.

우선 김영삼, 김대중 정권을 거치면서 어느 정도 잦아들어 가던 일본의 '사과'문제를 다시 정면으로 거론했다.

이와 함께 북-일 양국간 납치 일본인의 '가짜 유골' 사태로 전 일본 열도가 분노하면서 대북 경제제재 주장이 강해지는 상황을 직접 거론하고 나선 것도 그 하나다.

노 대통령은 "납치문제로 인한 일본 국민의 분노를 충분히 이해한다"고 전제하면서도 "일본도 역지사지해야 한다. 강제징용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이르기까지 일제 36년동안 수천, 수만 배의 고통을 당한 우리 국민의 분노를 이해해야 할 것"이라고 일본의 '이중성'을 지적한 것은 일본을 상당히 자극할 수 있는 대목이다.

또 노 대통령은 한국 정부와 국민은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 "잘 자제하고 사리를따져서 분별있게 대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일방적인 노력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고 언급한 것은 새로운 한일관계를 모색 과정에서 과거사에 대한 일본 정부와 국민의 진지하지 못한 자세가 '발목'을 잡고 있다는 인식을 우회적으로 내비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함께 '일본의 지성'을 거론한 것도 일본에게는 불편한 대목일 수 있다.

노 대통령은 일본 정부와 국민을 겨냥, "진실한 자기반성의 토대 위에서 한일간의 감정적 앙금을 걷어내고 상처를 아물게 하는 데 앞장서 주어야 한다. 그 것이야 말로 선진국임을 자부하는 일본의 지성다운 모습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노 대통령은 "그렇지 않고는 과거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아무리 경제력이 강하고 군비를 강화해도 이웃의 신뢰를 얻고 국제사회의 지도적 국가가 되기는어려울 것"이라고도 했다.

과거사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배상을 통해 이제는 유럽통합의 주역으로 떠오른 독일의 예까지 거론했다.

이는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서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 진출해 국제정치에서도 대국으로 발돋움하겠다는 열망이 강한 일본으로서는 꽤 아픈 대목이다.

이 같은 한국 대통령의 발언들을 앞으로 일본 정부와 국민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진정으로 '가깝고도 가까운' 나라로 한 차원 격상될 지, 아니면 또 다시 '가깝지만 먼' 나라라는 과거에 묶일 지 한일관계의 향방을 가를 것으로 보인다.

일본 정부와 국민의 반응이 주목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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