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타(불국사 주지)

프랑스 문학에 보면 라신(Jean Baptiste Racine(1639-99)의 작품으로 『소송광Les Plaideurs』(1668년)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이 작품은 희극으로 3막으로 구성된 작품입니다. 여기에는 소송광(訴訟狂)인 상인 시카노와 백작부인이 등장합니다.

소송광이라고 불릴 정도로 재판과 소송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열중하는 당시의 법관들과 귀족을 풍자한 작품입니다. 소송광이라는 다소 우스꽝스러운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소송과 재판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수 있다고 생각하는 소송만능의 풍조를 비웃고 있습니다.

전통사회에서 소송과 재판은 될수 있으면 피해가고 가급적 법에 힘을 빌리지 않고 해결하는 것을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송사(訟事)에 휘말리지 않는것을 처신에 한 덕목으로 여기기도 했습니다.

얼마전 경제신문에 소송에 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일본과 한국에 대한 소송건수의 비교와 세계각국의 소송건수에 대한 통계였습니다. 신문의 첫머리에는 일본과 비교한 한국의 소송과 고소에 관한 통계가 나와있었습니다.

"민사소송 일본의 6배, 고소는 155배."

민사소송은 일본의 6배이고 고소는 무려 155배였습니다. 내용의 경중을 떠나 숫자상의 단순비교만 가지고도 엄청나게 대비되는 통계였습니다.

우리보다 경제규모도 훨씬 크고 인구도 많은 일본보다 150배가 넘는 고소건수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사회의 복잡성이나 팽배해가는 개인주의,이기주의등 우리와 크게 다른 상황과 조건을 가지고 있지 않을텐데 어쩌서 우리는 이렇게 자랑스럽지 못한 수치를 가지고 있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한 해 형사고소에 따른 입건자 수만 60만명에 이르고, 112만명이 민사소송을 당한다고 합니다.

말 그대로 '소송'이 넘쳐나는 소송의 홍수속에서 살고있는 것입니다.

형사고소의 경우 80%는 검찰에서 기소조차 하지 않은 채 끝나버리는 "아무것도 아닌 사건"이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일단 고소해놓고 아니면 말고 식의 무책임한 행동이 대부분인것입니다.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를 당사자와 해결한다거나 여러방법을 쓰고 안될때 마지막에 택하게 되는 어쩔수 없는 선택이 아니라 무슨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손쉽게 택하는 방법으로 소송과 고소를 이용한다는것입니다.

물론 현대사회에서 소송과 재판은 꼭 필요한 제도입니다. 소송과 재판을 통해 정의가 실현되고 잘잘못이 가려짐으로써 약자나 강자 모두 법 앞에 평등하다는 정의를 세울수 있기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오히려 소송과 재판이 정의를 모호하게 만들고 질서를 무너뜨리는 역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마지막에 택하는 불가피한 방법이 아니라 가능한 소송먼저 하고보자는 잘못된 의식이 정의와 질서라는 소중한 가치를 오염시키고 있는것입니다.

지금 한국사회가 앓고 있는 '소송병'은 말 그대로 병입니다. 정상적인 행동에서 일탈한 극단적인 '증후군'입니다.

소송의 남발을 막기위해 여러가지 방법이 논의되고 있고 제도의 보완에 대한 의견도 제시되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제도의 보완과 더불어 재판과 소송을 통해서만 문제를 해결할수 있다고 생각하는 전도된 가치관의 "치료"입니다.

우리사회를 지탱해온 중요한 덕목이 병들어 가고있습니다. 될수 있으면 다툼을 피하고 다툰다 하더라도 제3자의 강제력을 의지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양보와 이해로 문제를 풀어가려 했던 노력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소송과 재판이 넘쳐나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일수는 없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고소하고 재판장에 세우는 사회를 살기좋은 사회라고 할수는 없습니다.

라신의 조롱처럼 "소송광" 소송병에 걸린 광인이 서로를 물고 뜯는 이 사회를 상생의 사회라고 말할수는 없습니다.

재판과 소송이 그 본래의 기능을 되찾고 사회의 질서와 정의를 지키는 신성한 제도가 되기위해서는 그것을 이용하는 우리의 가치관이 보다 성숙되어야 할것입니다. 법보다는 양심을 두려워하는 사회, 제재보다는 도덕으로 지켜지는 사회, 그것이 법이 이룩하고자하는 정의로운 사회일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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