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환(섬김의교회 목사)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의 라틴말이다.

로마황제들이 전쟁에 이겨 잔치를 베풀 때 전사한 적들의 시체를 잔치 마당에 늘어놓고 '메멘토 모리!'라고 외치며 건배를 했다고 한다. 지금은 이렇게 살아서 잔치를 벌이지만, 언제 저와 같은 모습이 될지 모르니 조심하라는 뜻으로 외쳤다고 한다.

로마의 산타 마리아 델라 콘첸찌오네 성당을 해골사원으로 부른다. 지하실에 성직자 약 사천 명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다. 이곳에는 죽은 동료들의 뼈와 두개골로 예배당 벽을 장식해 놓았다. 내부는 사람의 뼈로 장식을 했다고 보일 정도이다. 사람의 두개골과 넓적다리로 만든 아치가 있는가 하면 겹겹이 뼈를 쌓아올려 만든 커다란 삼각형 모양의 제단도 있다.

또한 천정이나 벽은 크고 작은 사람의 뼈를 교묘하게 맞추어 장식해 놓았다. 이 성당의 섬뜩한 상징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이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이라는 책에서 미치 앨봄은 대학 졸업 후 16년 만에 TV에서 온몸이 서서히 굳어가는 루게릭병에 걸려 있는 스승 모리 슈워츠 교수를 발견한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있는 스승을 매주 화요일에 방문한다. 그 방문의 기록이 이 책에 담겨 있다.

스승인 모리 교수는 이 교실 밖의 특별 강의를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났다. 모리 교수는 말했다. '죽음이란 생명이 끝나는 것이지 관계까지 끝나는 것은 아니다'라고. 모리 교수는 갔지만 그 분은 아직도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 관계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지금 아프가니스탄에는 대한민국의 젊은이 22명이 인질로 억류되어 있다.

일일이 여삼추(一日 如三秋)란 말이 있다. 나의 자유로운 의사가 아닌 타의에 의해 묶인 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질까? 생각해 보면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선 그들은 숨막히는 시간이 적어도 30년 이상은 흘러갔으리라.

이 세상에는 하루에도 많은 죽음이 있다. 아니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하루 평균 673명이 죽는다. 그중 17명이 교통사고로 죽고, 179명이 암으로 세상을 뜬다. 산업재해로도 하루 평균 7명이 죽고, 34명이 자살한다.

여기에 고인이 된 배형규 목사님의 죽음도 어쩌면 숫자상으로는 하나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런데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충격을 넘어 분노가 치밀어 오름은 어찌할 것인가?

'물에 빠진 사람 건져 주었더니 보따리 내 놓으라 한다'는 우리 속담이 생각난다. 인도적인 차원에서의 도움의 손길을 향해서 한두 발도 아닌 10발의 총상으로 죽였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민다. 어쩌면 그가 목사였기에 더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작 그 분은 그것마저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최후를 맞았으리라.

이형기 시인은 '낙화'라는 시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 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영혼의 슬픈 눈//

그 자신의 생일날! 하나님의 사명완수를 가슴에 품고 척박한 아프가니스탄의 이름 모를 외진 곳에서 보여준 그의 의연한 모습! 그런데도 기가 막힙니다. 그의 시신은 황량한 사막지대의 도로변에 내던져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하나? 백척간두! 생사의 기로에 선 22명의 젊은이들! 답답한 마음이다. 이들의 삶과 죽음을 헤아리기에는 내 영혼의 깊이가 너무 짧다. 오직 두 손 모아 간절한 심정으로 그들의 무사귀환을 기도할 뿐이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우리는 지금 여기에 있다.

그런데 여기가 어딘지 아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삶을 기억하라' '오늘의 삶을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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