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환(섬김의 교회 목사)

탕평책(蕩平策)에서 탕평은 삼경(三經)의 하나인 상서(尙書)의 홍범구주(洪範九疇)가운데 제5조인 황극설(皇極說)의 무편무당(無偏無黨) 왕도탕탕(王道蕩蕩) 무당무편(無黨無偏) 왕도평평(王道平平)에서 나온 말로서 치우치거나 무리짓지 않으면 왕도가 넓어지고, 무리짓거나 치우치지 않으면 왕도가 공평해진다는 뜻이다.

붕당으로 시비가 진실하지 않고 용인(用人)의 길이 넓지 않으며 기강이 서지 않고 언로가 막히며 염치가 없어졌다고 지적한 조문명의 표현에서 그 폐단이 잘 나타나 있는데, 붕당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위의 다섯 가지 가운데 용인 즉, 당색에 관계없이 유능한 인재의 등용이 가장 근본적인 것이다. 그것이 해결되면 나머지는 자연히 해소되므로 탕평은 곧 노소남북의 인재를 골고루 등용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이 이명박 후보의 승리로 끝났다. 경선과정의 치열함을 의식해서인지 이명박 후보는 후보수락연설을 박근혜 후보를 의식하는 발언들로 채웠다. 그래서 아마 박근혜 후보에게 선대위원장직을 제안할 모양이다. 박근혜 후보도 정권교체를 위해 백의종군하겠다고 화답했다. 그런데 승자의 '탕평책'과 패자의 '백의종군', 말처럼 쉬운 것일까?

탕평책은 영조와 정조 때에 당쟁을 일삼고, 능력보다는 자신의 무리에 가담한 사람을 우선 천거하는 방식으로 정사가 농단되어 이를 무마하고, 인재를 바르게 중용함으로써, 당쟁의 폐단으로부터 벗어나고, 백성들에게 선정의 결과가 고스란히 전달되도록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기회를 주고자 했던 정책이다. 그런데 승리만을 위해 투쟁한 이명박 후보 진영이 과연 실시할 수 있을까. 경선을 하면서 불거진 양 캠프간의 앙숙관계를 청산하기 위한 방편으로 거론되는 탕평책이 가능한가.

과연 오늘의 정치인들에게 가능한 이야기로 들리는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하다. '탕평책'이니 '백의종군'이니 하지만 그 실천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영조나 정조, 그리고 이순신 같이 한 민족의 역사에 한두 명 나올까 말까 하다. 그만큼 어렵다는 것이다.

음식에도 문화는 있다. 중국과 일본도 우리나라처럼 젓가락을 쓰지만, 막상 숟가락은 우리나라에서만 쓴다. 중국과 일본 사람들은 국물을 덜 때만 숟가락을 쓴다. 중국과 일본의 것은 국자처럼 생겨 우리 것과 다르다.

또한 밥을 먹을 때도 저들은 밥그릇을 손에 들고 젓가락으로 퍼먹고, 우리는 밥그릇을 내려놓고 숟가락으로 떠먹는다. 우리의 어른들은 아이들이 밥그릇을 들고 먹으면 거지도 아닌데 들고 먹는다고 상스럽다며 야단을 친다. 저들이 만약 밥그릇을 내려놓고 먹으면 개도 아닌데 입을 박고 먹는다고 꾸지람을 한다.

우리나라 음식에는 반드시 국물이 뒤따른다. 국이 빠진 식탁은 우리나라에서는 상상하기가 어렵다. 국물이 있어야만 밥을 먹는다. 이름 하여 탕 문화(湯文化)이다. 탕은 물 수와 양을 합한 글자이다. 양은 뻗쳐오른다는 뜻이다. 음식 재료를 넣고 끓여서 만든 것이 탕(湯)이다. 국을 나타내는 한자로 갱(羹)을 쓴다. 여러 가지 재료를 섞어 오래 끓이면 각 재료의 맛이 어우러져 원 재료의 맛과 전혀 다른 깊고 오묘한 맛이 우러난다. 이것으로 보아 탕 문화(湯文化)는 조화(造化)의 문화(文化)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성경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로마서 12장 15절)'고 했다. 곧 상대의 입장을 배려하는 마음과 마음의 교통을 의미 합니다.

보여주기 위한 만남은 의미가 없다. 만남에 행복이 있어야 한다. 만나서 악수하고 사진 찍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원칙에는 합의하고 상대를 탐색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났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행복한 만남이어야 한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만남,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만남, 괴테와 실러의 만남, 퇴계(退溪)와 율곡(栗谷)의 만남, 공자(孔子)와 안연(顔淵)의 만남. 이러한 만남을 통하여 영혼의 각성이 일어나고, 정신의 새로움이 생기고, 종교의 혁명이 일어나고, 학문과 예술의 꽃이 피어났다. 조화의 탕(湯)이 담긴 음식에 나의 숟가락과 상대의 숟가락을 같이 담그는 것이다. 탕(湯)속에 피어나는 탕평(蕩平)의 만남이 될런지 누가 알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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