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타(불국사 주지)

포스트 모더니즘(postmodernism) 시대에 가장 큰 특징을 말한다면 다양성일 것입니다.

절대주의의 해체(Deconstruction)와 더불어 탈 이념적 다양함에 대한 존중 일 것입니다.

음악, 미술, 영화, 문학, 건축 등 전반에 걸친 거대담론은 결국 상대성에 대한 인정입니다. 절대성에 대한 고집에서 다양함을 인정하는 상대주의적 태도, 서로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의 수용입니다.

현대는 다원화된 사회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상대성을 부정한다면 다원화는 곧 갈등과 폭력의 이음동의어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고 수용한다면 서로의 보완과 수정을 통해 훨씬 더 풍요롭고 발전적인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다원화에 가장 필요한 것은 조화입니다. 각각의 개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공존의 방법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지난 17일 포항에서 아름다운 모임이 있었습니다. 포항시 북구 흥해에 자리 잡은 유서 깊은 산사(山寺) 천곡사에서 포항지역 천주교 신부님들과 스님들이 함께한 자리였습니다. 2003년 1월부터 시작된 이 모임은 금번으로 20회째라고 합니다.

서로의 종교에 대한 이해와 지역사회 문제를 함께 고민하자는 취지로 모이게 된 이모임은 아마도 전국에서 유일한 모임이라는 생각입니다. 종교인간의 개인적 만남은 있었지만 정기적으로 자리를 마련하여 함께하는 것은 처음이라고 들었습니다.

종교는 다툼보다 화해와 용서를 추구합니다. 어떤 종교든 추구하는 목적은 다르지 않습니다. 근본적인 뜻을 같이 함에도 배려와 양보가 부족한 것은 서로 잘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수님과 부처님이 한자리에서 토론한다면 반드시 그 분들은 한 가지 진리에 도달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우스갯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그분들의 가르침은 분명 화해와 용서임에도 후세가 다른 신념을 이유로 배척하거나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그 분들의 큰 뜻에 어긋난다는 의미였습니다.

자신의 그것에 비춰 상대가 다르면 마음에서 어긋남이 일어납니다. 불쾌해지기도 합니다. 익숙한 자기의 습관을 강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환경과 오랜 경험에 의해 형성된 본인의 생각일 뿐입니다. 자신의 기준이 절대적일 수 없습니다. 이렇게 사소한 것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장구한 역사를 통해 형성된 교리와 사유체계를 갖고 있는 종교에 대해 자신의 가치체계를 준거삼아 옳고 그름을 나누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입니다. 지금은 비교와 판단보다는 존중과 배려의 자세가 더 필요한 때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본다"라고 할 때 보는 것은 눈이라는 물질이 아니라 마음을 통해 보는 것입니다. 즉 본인이 갖고 있는 신념체계를 통해 보는 것입니다. 단순히 눈 그 자체로만 본다면 사물이나 생각이 모두 같아야 합니다. 그러나 각각입니다. 다른 신념체계를 통해 대상을 보기 때문입니다. 같은 신념체계를 공유하는 사람과 다른 그것을 갖고 있는 사람과는 다를 수 밖 에 없습니다. 결국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닌 내 신념으로 사물을 본 하나의 견해일 뿐이고 함께 공유하는 사람들의 생각일 뿐입니다.

천주교에서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사람의 귀함을 말합니다. 불교에서는 불성(佛性), 즉 부처님의 성품을 간직하고 있다는 의미로서 인간의 존엄을 말합니다. 어떤 이유든 귀함과 존중은 하나입니다. 다른 견해를 갖고 있는 이들도 이러한 존엄과 귀함에 포함되어야 합니다.

다양성과 다원화는 그러한 사람들이 구성되어 만드는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산사에서 신부님들과 함께하는 저녁식사는 참으로 화기애애하고 정감 넘치는 자리였습니다.

서로를 존중하는 아름다운 자리였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의 이러한 모습은 그 분들을 따르는 신도들에게 좋은 모범이 될 것입니다.

좋은 자리에 초청을 해주신 천주교 대구대교구 제4대리구 주교대리 조정헌신부님, 포항사암연합회 종문스님과 함께하신 신부님, 스님들께 감사드리며 이러한 모임이 계속되어 종교간의 이해를 여는 장이 되기를 기대해봅니다.

아주 오랫동안 여운이 남았던 기도문이 있습니다. 성 프란체스코의 기도문입니다. '다툼이 있는 곳에 화해를,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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