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재 훈<포항강변교회 목사>

며칠 전, 갈증 때문에 생수를 사러 편의점에 들렀다. 늦은 밤, 편의점 안에는 대학생같이 보이는 여종업원이 카운터에서 “어서 오세요”라며 눈길은 주지도 않고 형식적인 인사를 했다. 그 곁에는 같은 또래의 남학생 둘이 함께 있었다. 그들은 재미있게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나는 생수를 찾으러 편의점 냉장고 쪽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그 때 언뜻 들려오는 말이 “니네 엄마 용돈 많이 주잖아. 그런데 뭐 하러 취직해서 눈치 보면서 피곤하게 살려고 그래. 취직하지 말고 알바-아르바이트-하는 데나 알아봐. 그게 훨씬 좋아. 내가 주유소 한 군데 소개해 줄까?”

그들의 말을 엿듣는 순간 약간의 현기증이 일어났다. 젊디젊은 청년들의 대화의 주제가 너무나 유치하고 수준 이하였기 때문이었다. 미래에 대한 삶의 꿈과 희망보다는 하루하루를 즐기기 위해 살아가려는 저들의 안일한 심사를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즐김 자체를 정죄하려는 것은 아니다. 엄연히 평생직장을 구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힘써야 할 청년들이 아직도 어머니의 용돈에 자신의 즐거움과 연계하여 생활하겠다는 그 발상이 안타까웠던 것이다.

‘모라토리움, Moratorium’이란 경제금용 용어가 있다. 라틴어의 어원은 “지체하다”라는 의미의 말이다. 우리말로 번역한 것을 보면 “대외 채무 지불 유예”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더 이상 채무를 갚을 수 없습니다” 라는 부도 상태를 선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의미를 가진 말이라고 경제학자들은 말한다.

여기 ‘모라토리움’상태를 빗대로 만들어진 조어(造語)가 ‘모라토리움 인간’이다. ‘모라토리움 인간’을 정의할 때는 “직접, 간접적으로 육적, 정신적 의무를 다할 줄 알면서도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지 않는 사람, 즉 사회의 ‘아웃사이더’에서 맴돌며 사회적인 방관자, 사회의 귀속의사 거부, 사회적 자아 정체성 거부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이런 사람들을 일본에서는 ‘기생충, Parasite’족이라고 부른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능력이나 조건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부모나 사회의 지원, 또는 보조금으로 자신의 삶을 영위해 나가려는 나약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일게다.

사람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때 가장 행복한 존재가 된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노동의 역사이다. 종교 개혁자 깔뱅은 노동의 신성함을 강조했고, 노동에 있어서의 귀천(貴賤)을 거부했다.

오늘 이 시대도 그렇다.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있는 것도 일하고 싶은 사람들은 많은데 일할 수 있는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일자리가 없어 일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하는 극단적인 상황에 내몰리기도 하고 있다. 그래서 정부는 정권의 운명을 걸고 일자리를 만들어 주겠노라고 국민들에게 소리치고 있는 것이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우리 젊은이들 의식 속에는 노동의 신성함보다는 쾌락의 달콤함에 더 깊은 유혹을 받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 보인다. 일하지 않고, 아니 적당하게 일하고도 쾌락을 누릴 수 있는 방향으로 기울고 있는 듯 보인다. 그래서인지 소위 말하는 성인(成人) 아이들이 증가추세에 있다. 결혼을 해도 생계유지는 부모에게 의존해서 해결해 가는 성인 어른들 말이다.

이 시대, 부모 된 어른들은 생각을 좀 달리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일하기 싫은 자녀들을 애처롭게 보면서 용돈으로 그들을 달랠 것이 아니라, 고생스럽더라도 자녀들이 스스로 자립하여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 줘야한다.

어른들의 생각이 약하면, 자녀들의 장래는 보장받기 어려워진다. 거친 세상으로 몰아내야 한다.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자녀들이 고생하는 것을 좋아할 부모는 없다. 그러나 그들의 내일을 위해서 오늘의 고생을 피하게 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모라토리움 인간, 또는 기생충 같은 인간으로 살게 해서는 개인도 국가도 장래를 보장받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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