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 시인·포항대학교 간호학과 겸임교수
최영미 시인·포항대학교 간호학과 겸임교수

꽃샘추위가 몇 차례 지나가고 그 칼날 같은 바람 속에서도 개나리가 왔다 가고 진달래가 왔다 갔다. 이제 영산홍의 시절이다. 화단이 붉게 타오르고 공원에는 사진 찍는 할머니들로 붐빈다. 삼월부터 시작된 봄이니 참 바쁘게도 많은 것들이 다녀갔다. 특별한 의미로 남은 것들은 오롯이 살아있기도 하지만 많은 것들이 존재감을 남기지 못한 채 스러져 갔다. 기억되는 것보다는 아무런 기억이 되지 못하는 것이 언제나 훨씬 많다. 지나고 나서 돌이켜보는 건 변명일 뿐 바쁘다는 건 참 말도 안 되는 핑계다.

그런데 불현듯 그 공원에서 영산홍이 비명처럼 내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 짙붉은 비명이 왜 내게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나는 오래 그 앞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멀리서만 보았던 꽃을 처음처럼 그렇게 들여다보았다. 다음 말을 들을 수 있을 때까지.

누군가에게 나를 각인 시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름이 특별하다거나 미모가 특별하다거나 재치있는 말을 잘한다거나 무엇이든 평범하지 않은 것이 하나쯤은 있어야 상대방이 자신을 잊지 않게 새길 수 있다. 이름을 바꾸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얼굴 성형을 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물던 내게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넌 영산홍인데 그러면 나는 누구인가?

느닷없이 정체성에 대해 고민할 때가 있다. 준비도 없이 충격적인 일을 겪을 때도 그렇고 열등감 속에서 몸부림칠 때도 그렇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철학자 데카르트가 그랬듯 존재와 생각은 원인도 결과도 아닌 양립하는 그 무엇이다. 나는 그러니까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가진 순간부터 진정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생각만 있다 해서 내가 존재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것으로는 내 정체성이 명확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방법을 바꿔보는 것 또한 방법이다. 데카르트식의 의심법이다. 나는 나를 의심한다. 내가 정말 존재하는가. 나는 없는 존재임에도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없고 실재하는 것은 저 영산홍이 아닐까. 나는 없는 존재가 아닐까.

그런 고민 속에서 엎치락뒤치락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나는 존재한다’라는 결론이다. 나는 나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영산홍의 힘을 빌렸다. 영산홍의 비명은 자신을 알리려는 게 아니라 나를 발견했다는 놀람의 표현이었다. 나에게 너는 존재하고 있어, 라고 말해주려던 것이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천지에 꽃만 가득하여 내 존재는 그 어디에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사진을 찍으려다 말고 퍼뜩 떠오른 생각이 그것이다. 내가 들여다보고 감탄해주어야만 존재하게 되는 영산홍처럼 나 또한 영산홍에게는 그랬던 것이다.

나는 확실히 존재한다. 영산홍이 나를 불러주었기 때문이다. 당신 또한 나처럼 존재한다. 내가 당신,이라 불러주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 존재한다. 다만 기억할 일이 있다. 영산홍은 자신이 가장 아름답게 붉은 때에 나를 불렀다. 적어도 누군가를 부를 때의 자세는 그래야겠다. 가장 붉을 때 가장 아름다울 때, 그때가 아니라면 아무리 훌륭한 당신이라 하더라도 아무도 부르지 마시기를….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