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람쥐나 청설모가
입안 가득한 상수리 열매를 어쩌지 못해
도린곁 어웅한 데다
그걸 파묻어 버리곤 더러 잊는다고 한다
나 같으면 나무 십자가라도 세워 놓았을 그곳을
까맣게 잊어버린 탓에
먼 훗날 푸른 어깨를 겯고 숲이 나온다고 한다

기억보다 먼저
망각이 품고 나온 숲,
그 망각 때문에 울울창창해진 숲,
용서보다 웅숭깊은 망각,
어딘가 잊어 둔 파란 눈의 감정도
여러 대륙에 걸쳐 사는 당신도
어쩌면 망각을 옹립한 탓에





<감상> 도토리 속껍질에는 탄닌(Tannin)이라는 떫은 성분이 있어 다람쥐, 청설모, 어치(산 까치)가 땅속에다 이것을 숙성시킵니다. 외딴 곳에 파묻어 놓고 잊어버리는 건망증 덕택에 싹이 튼 도토리는 숲을 이룹니다. 망각이 없었더라면 울창한 숲도 없고 사랑의 감정도 새로 생기지 않을 겁니다. 망각은 용서보다도 훨씬 더 웅숭깊습니다. 망각을 옹립한 탓에 어딘가 묻어둔 사랑의 감정도, 멀리 떨어져 사는 당신도 숲처럼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잊어달라고 망각을 부탁하는 당신의 태도는 당연한 것이고, 어쩌면 나는 새로운 사랑을 위해 이를 기다려왔는지 모릅니다. <시인 손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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