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풍은 무엇에서부터라도 나를 끊어 준다
등지고 있는 얼굴이여
죽음에 취한 사람처럼 멋없이 서서
병풍은 무엇을 향하여서도 무관심하다
죽음의 전면(全面) 같은 너의 얼굴 위에
용이 있고 낙일(落日)이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끊어야 할 것이 설움이라고 하면서
병풍은 허위의 높이보다도 더 높은 곳에
비폭(飛瀑)을 놓고 유도(幽島)를 점지한다
가장 어려운 곳에 놓여 있는 병풍은
내 앞에 서서 죽음을 가지고 죽음을 막고 있다
나는 병풍을 바라보고
달은 나의 등 뒤에서 병풍의 주인 육칠옹 해사(六七翁 海士)*의
인장(印章)을 비추어 주는 것이었다.

* 조선말기 문신이자 서예가였던 김성근(1835-1919)으로 추정됨. 해사는 김성근의 호

<감상> 병풍은 죽음 앞에서 전면(全面) 같지만, 뒤집어 놓으면 삶의 전면도 된다. 병풍은 존재를 단절시키는 존재라기보다는 삶과 죽음의 양면성을 동시에 지닌다. 무관심하게 서있으면서 허위(虛僞)의 높이보다 더 높게 죽음을 점지한다. 병풍은 죽음을 가지고 놀면서 죽음을 깨우치고, 먼저 끊어야 할 것은 설움이라고 일러준다. 달이 내 등 뒤에 있다면 냉철하게 죽음을 바라보라는 병풍의 선문답, 과연 범인(凡人)들이 깨달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죽음의 마음으로 삶을 살라는 상주사심(常住死心)을 좌우명으로 삼은 김수영 시인의 정신을 지닌다면, 과연 죽음으로 죽음을 극복할 수 있을까. <시인 손창기>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