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동학 혜명학술원 원장
류동학 혜명학술원 원장

 

1932년 4월 29일은 독립운동사의 큰 분수령이 된 날이다. 이날은 바로 25세의 청년 매헌 윤봉길(1908년~1932년)의사가 일본 왕 생일인 천장절과 상해사변 전승 축하식이 열린 상하이 훙커우 공원(현 루쉰공원)에서 폭탄으로 일본군 대장과 거류민 단장을 비롯한 여러 명을 저격하여 전 세계를 놀라게 한 날이다. 훙커우 의거는 윤 의사가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 生不還·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비장한 글을 남긴 채 고향 충남 예산군 덕산면을 떠난 지 2년 만에 이룬 쾌거였다.

이 쾌거로 국민당의 장개석 총통은 종래 무관심하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여 임시정부가 다시 독립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한편 윤봉길 의거는 안창호의 체포와 임시정부가 8년간의 풍찬노숙의 6천㎞의 대장정을 떠나게 된 계기가 된다. 이 장정은 1934년 10월부터 1935년 11월까지의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궁 공산당 홍군이 장시성(강서성)루이진(서금)에서 산시성(섬서성) 옌안까지의 12,000㎞의 대장정보다 긴 기간이었다.

임시정부는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전장→창사→광저우→류저우→치장을 거쳐 1940년 9월 충칭시에 도착한다. 항저우시기(1932년 5월~1935년 11월)는 청사는 항저우에 두면서 자싱시(가흥)와 하이옌현(해염현)에서는 김구와 이동녕·김의한·박찬익·엄항섭·이시영·조성환·조완구·차리석 등이 중국인인 추푸청(독립장)일족및 주아이바오의 비호로 생활했다.

1935년 11월 임시정부는 천궈푸(진과부·대통령장)가 이끄는 장쑤성의 성정부가 있던 전장으로 옮겼다. 전장 인근의 난징은 국민당 정부가 있었다. 한편 이 당시 사회주의 계열의 김원봉은 1932년 대일전선통일동맹과 1935년 민족혁명당을 수립하여 큰 세력을 갖게 되고, 라이벌 관계였던 김구는 겨우 임시정부 여당 역할의 한국국민당을 꾸려 나가던 시절이었다.

1937년 7월 일본은 노구교사건을 일으켜 중일전쟁을 시작했다. 이에 장제스(대한민국장)의 국민당 정부는 11월 난징에서 충칭으로 천도를 결정했다. 이에 임시정부도 11월 말 후난성의 성도인 창사로 이전하여 1938년 7월까지 약 8개월간 머물렀다. 이후 일본이 점령하여 난징대학살을 자행한다. 1938년 5월 6일 지청천의 조선혁명당과 조소앙, 홍진의 한국독립당, 김구와·이동녕·이시영의 한국국민당 등 3당이 합당 문제로 남목청 조선혁명당 본부에 모였다. 이때 김구가 남목청에 참석했다가 이운환에게 피습되는 이른바 ‘남목청 사건’이 발생하여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1938년 7월 임시정부는 다시 광둥성의 광저우와 포산시(불산시)로 이전하여 10월까지 3개월간 머문다. 이곳은 현재 동산백원, 황포군관학교, 기의열사능원, 중산대학강당 등 독립운동의 유적지가 있다. 1938년 10월 임시정부는 일본군의 폭격을 피해 광서장족자치구의 류저우시로 이동했다. 성도가 난닝인 광시좡족자치구는 최고의 관광지인 구이린(계림)으로 유명한 곳이다. 류저우는 당송팔대가이자 간담상조(肝膽相照)의 고사로 이름난 유종원으로 유명해진 도시이다. 필자도 유저우 임시정부 활동진열관과 유후공원을 답사한 적이 있다.

임시정부는 1939년 4월 다시 충칭시 남쪽 외곽인 치장(기강)현으로 약 900㎞를 이전한다. 이후 임시정부는 치장에서 1940년 9월 충칭으로 이전하기까지 1년 5개월간 머문다. 치장 시기에 임시정부 초대 임시의정원 의장이자 주석을 역임했던 임정의 수호자 석오 이동녕(1869~1940)이 영면한다. 이후 임시정부는 국무위원제를 폐지하고 주석제를 강화하여 군사권도 지휘하는 권한을 가지게 된다. 백범 김구가 실질적인 임시정부 지도자 반열에 오르는 순간이다. 충칭 임시정부는 1945년 11월 개인 자격으로 환국할 때까지 맹활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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