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종종 노예적 삶을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평생을 주인이 시키는 대로, 나가라면 나가고 들어오라면 들어오는, 수동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한 번도 주체적으로 결정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실행하며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학교 다닐 때는 오로지 성적 나오는 대로 진학을 했고 학교를 마친 뒤에는 ‘전망이 좋거나 월급이 많거나 근무하기 편한’ 직장을 주로 전전했습니다. 결혼 후에는 더합니다. 그때그때 주어진 과제를 수행하기에 바빴습니다. 살림 차리고 집 사고 차 사고 아이 낳아 키우는 일에 한눈팔 시간이 없었습니다. 사랑받는 직장 동료, 인정받는 시민으로 사는 과제도 결코 녹록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한평생을 보냈습니다. “도대체 내 인생을 누구 마음대로 산 거야?”라는 볼멘소리가 안으로부터 터져 나옵니다.

생각해 보니 저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존재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집사람도 소유권을 주장하고, 집 아이들도 그렇고, 돌아가신 부모님들도 살아생전에 그러셨고, 종교를 가진 뒤에는 신과 그의 종복들도 저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합니다. 저의 선택으로 제 주인이 된 사제들은 잊을 만하면 꼭 그 ‘소유권 문제’를 환기 시킵니다. 죽어서 천국에 들고 싶다면, 성실히 제례에 참여하고 교무금이나 봉헌금도 꼬박꼬박 낼 것을 명합니다. 젊어서는 직장에서도 소유권을 주장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교수가 공부나 하지 쓸데없이 막대기(죽도)나 지고 다닌다”고 대놓고 타박을 주시던 선배 교수도 있었고 “공부하기도 힘들 텐데 그런 힘든 운동을 마다 않고 열심히 하고 있으니 참으로 기특하다”라고 격려해준 학장님도 있었습니다. 타박이든 격려든, 모두 저에 대한 소유권 주장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대와 응원은 언제나 소유권과 관련되니까요. 그들의 소유권에 순응하면서 때로는 눈치를 살피며, 때로는 의기양양하게 살아왔습니다.

사는 일이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런 물음이 제게는 너무 늦게 찾아온 것 같습니다. 오정희 소설 ‘동경(銅鏡)’을 보면 그러한 물음에 대한 작은 해답이 실려 있습니다.

“참 이상하죠. 난 요즘 자주 죽은 사람들 생각을 한다우. 꼭 아직도 살아 있는 것처럼 그 사람들 생전의 일이 환히 떠오르는 거예요. 그러면서 정작 우리가 살아온 세월은 기억이 나지 않아요. 아무리 애를 써도 기억나지 않는 희미한 꿈같아요. 당신은 쉰 살 때, 마흔 살 때를 기억하세요? 난 통 그때의 당신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아요. 난 아무래도 너무 오래 살고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요. 뜰 손질도 이제 힘이 들어요. 하지만 하루만 내버려둬도 잡초가 아귀처럼 자라니…… 요즘 같은 계절엔 더 그래요”‘중략’

늙은이는 반성하지 않는다. 반성을 요구하는 어떤 새로운 삶을 기다리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높고 찢어질 듯 날카로운 노랫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뻐꾹, 뻐꾹, 봄이 왔네. 뻐꾹, 뻐꾹, 복사꽃이 떨어지네. ‘오정희, ‘동경’’

‘쉰 살, 마흔 살’ 때의 일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작중 인물의 말이 남의 말 같지 않습니다. 제가 지금 그렇거든요. 그리스 신화에는 근심의 신 ‘쿠라’가 흙으로 인간을 만들고 제우스에게 부탁해 영혼을 불어넣은 뒤 자신의 소유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죽으면 몸은 땅의 신(흐무스)이, 영혼은 하늘의 신(제우스)이, 가지겠지만 살아있을 때는 오로지 자신만이 인간의 주인이라고 쿠라는 주장합니다. 아무래도 근심할 일들이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하는 중, 노년의 삶은 쿠라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기억이 나질 않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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