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 향한 일편단심…죽음도 불사한 기개 느껴지는 듯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성동리 뇌성산 기슭에 아늑하게 자리한 광남서원(廣南書院)은 영의정으로 단종을 보좌하다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에 살해된 충정공(忠定公) 지봉(芝峰) 황보인(皇甫仁)과 그의 두 아들 참판공(參判公) 석(錫)과 직장공(直長公) 흠(欽)을 제향하는 서원이다.

경북서원지 등에 따르면 이곳은 1791년(정조 15)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황보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해 위패를 모시고 세덕사(世德祠)라고 불렸다.
포항 광남서원 현판
1831년(순조 31)에 ‘광남서원’이라고 사액(賜額)돼 사액서원으로 승격됐으며,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했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毁撤·헐리게 됨)됐다가 1900년에 옛터에 후손들이 재건립해 광남서당으로 부르기도 했다. 1941년에 지역유림들이 논의해 충정묘우를 중건해 춘추향을 회복하고 1949년네 문루와 동제 주사를 건립하고, 2001년에는 서재를 국고 보조로 신축했다.

장기 유림과 후손들은 매년 음력 2월 중정(中丁)에 향사(享祀)를 지내고, 그 숭고한 사생취의(捨生取義 ·의를 위해서는 생명을 돌보지 아니함) 정신을 추모하고 있다.

포항 장기유림들이 올해 음력 2월 중정(양력 3월 21일) 때 광남서원에서 향사를 봉행하고 있다.
◇ 제향인물

△황보인(皇甫仁)

1387(우왕 13)~1453년(단종 1).

조선 초기 문신으로 경기 파주 광탄면 창만리에서 출생했으며, 파주 법원읍 동문리에 묘가 있다. 그의 묘는 지난해 12월 파주시 지정 문화재로 됐다.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사겸(四兼)·춘경(春卿), 호는 지봉(芝峰).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임(琳)의 아들이다.

1411년(태종 11) 사마시에 합격해 사헌부감찰을 역임했고, 1414년(태종 14)의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1418년(세종 즉위) 사간원의 정언을 거쳐 1420년 집현전 전료가 됐다.

1440년 평안·함길도 도체찰사로 파견되고 같은 해 의정부좌참찬 겸 판병조사가 되면서 국왕으로부터 대소행행(大小行幸)에 항상 호종하라고 할 정도로 총애를 받았다.

1441년 함길도에 파견돼 종성·회령·온성·경원·경흥 등지에 소보(小堡)를 설치해 북방 방어를 강화했다.

이후 빈번하게 평안도와 함길도를 출입하면서 김종서(金宗瑞)와 쌍벽이 돼 북변을 개척하고 방어하는 데 공헌했다.

1445년 좌찬성으로 판이조사(判吏曹事)를 겸임하고, 1447년 우의정이 됐다.

그 뒤 1449년 의정부의 직에서 해임된 뒤 양계축성(兩界築城)의 일에 전념하겠다고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아 우의정에 유임하면서 축성사를 관장했으며, 같은 해에 좌의정이 됐다.

1450년(문종 즉위) 사은사로 부사 김효성과 함께 명나라에 파견됐다가 문종의 고명(誥命)을 받고 귀환했으며, 이듬해 영의정부사가 됐다.

1452년(단종 즉위) 빈전(殯殿)·국장(國葬)·산릉도감(山陵都監)의 총호사(總護使)가 돼 문종의 국상을 총령했고, 이듬해에 영춘추관사로서 감춘추관사 김종서 등과 함께 세종실록을 찬진했다.

1453년 10월 11일 계유정난으로 좌의정 김종서, 우의정 정분, 우찬성 이양, 이조판서 조극관 등과 함께 문종의 명을 받아 어린 단종을 보필하던 중 피살됐다. 억울한 죽음을 당한 이후에도 294년간 신원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1719년 후손이 이조(吏曹)에 서록(敍錄)됨으로써 부분적으로 신원 됐고, 1746년(영조 22) 복관되면서 완전히 신원됐다.

그 뒤 1758년에는 충정(忠定)의 시호를 받았다.

1791년(정조 15) 단종의 능인 장릉(莊陵) 충신단(忠臣壇)에 배식(配食)되고, 1804년(순조 4) 집 앞에 정문이 세워졌으며, 1807년 조상의 묘를 옮기지 않는 부조지전을 받았다.

영천의 임고서원, 진주의 도동서원, 황주의 오봉서원, 종성의 충렬사, 동학사의 숙모전, 공주의 요당서원 등에서 제향되고 있다.



△ 황보석(皇甫錫)

?~1453(단종 1). 황보인의 아들로서 아버지와 함께 화를 당했다.

△ 황보흠(皇甫欽)

?~1453(단종 1). 황보인의 아들로서 아버지와 함께 화를 당했다.

광남서원 배치도.
◇ 광남서원 구조

광남서원은 복양문(復陽門), 강당(숭의당·崇義堂), 내삼문, 사당(충정묘·忠定廟)까지 하나의 축에 있는 전학후묘(前學後廟) 배치를 보여준다.

강당 앞에 좌우로 동재와 서재를 배치해 비교적 온전한 서원의 모습을 갖췄다.
포항 광남서원 담벼락.
숭의당 뒤쪽으로 자연석 축대를 2단으로 쌓아 사당 영역을 형성했다.

사당 영역 우측에 숭의당 옆쪽으로 계단을 통해 진입이 가능한 곳에 충비단량지비각(忠婢丹良之碑閣)과 추원단(追遠壇)을 뒀다.

복양문의 좌측에 비각이 있으며 복양문의 외부로 담을 둘러싼 것은 특이한 점이다.



◇ 충비 단량

광남서원과 영천 황보 씨 가문의 이야기를 할 때 빠뜨릴 수 없는 것이 바로 ‘충비 단량’에 관한 일화다.

단량(丹良)이란 계유정난 때 영의정 황보인의 여자 하인 이름이다.

수양대군이 왕이 되려는 야심으로 정변을 일으켜 황보인과 참판공 석과 직장공 흠, 그리고 석의 아들 원과 문 등 다섯 사람이 화를 당했다.

황보인은 영천 황보씨의 멸문의 화를 피하고 대를 잇기 위해 흠의 아들이자 그의 손자인 단(湍)을 단량에게 부탁했다.

단량은 어린 단을 물동이 안에 숨겨 머리에 이고, 한양을 탈출해 황보인의 막내 사위 윤당이 살고 있는 현재의 경북 봉화군 상운면까지 800여 리를 걸어 왔다.

하지만 윤당은 노자를 쥐어 주며 ‘여기도 안전한 곳이 아니니 어디론지 땅끝까지 가서 안전한 곳으로 살되 어미처럼 아이를 키워 조상에 대한 이력을 알려주라’고 했다.

그녀는 땅의 끝인 포항시 남구 호미곶면 구만리(앞이 망망한 바다라 이제 ‘그만’ 갈 수 밖에 없다해서 유래됐다는 설) 집신(集臣)골에 다다른다.

단량은 단을 친자식처럼 키워 조상에 대한 내력을 알려줬으며, 증손 억이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성동 3리로 이주해 이후 새로운 세거지를 이뤘다.

황보현 영천 황보씨 전 대종회 회장(전 포항 장량동새마을금고 이사장)은 “단량 할머니는 그야말로 장기·구룡포 황보 씨들의 은인 같은 분”이라고 눈시울을 붉혔다.
황보 인의 손자를 물동이에 지고 포항시 남구 호미곶면 구만리 집신골까지 피신와 황보 가문의 대를 잇게 해준 충비 단량의 일화를 바당으로 제작된 연극 ‘집신골의 어머니’ DVD 케이스.
이러한 드라마틱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지난 2009년 김삼일 대경대 석좌교수가 연출해 포항시립연극단에서는 ‘집신골의 어머니(부제 : 충비 단양)’로 공연을 하기도 했다.

한편 충비 단량의 은혜에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자 영천 황보씨 문중은 매년 음력 10월 영천 황보씨 시조 묘사에 이어 묘가 실전된 단·서·강 3대에 대한 묘제와 함께 충비 단량에 대한 묘사를 지내고 있다.

포항 장기유림들이 올해 음력 2월 중정(양력 3월 21일) 때 광남서원에서 향사를 봉행하고 있다.
포항 장기유림들이 올해 음력 2월 중정(양력 3월 21일) 때 광남서원에서 향사를 봉행하고 있다. 황보현 영천 황보씨 대종회 전 회장이 충정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포항 장기유림들이 올해 음력 2월 중정(양력 3월 21일) 때 광남서원에서 향사를 봉행하고 있다. 제관들이 진설될 제물을 살펴서 검사(監)하고 있다.
포항 장기유림들이 올해 음력 2월 중정(양력 3월 21일) 때 광남서원에서 향사를 봉행하고 있다. 제관들의 역할 분담(분정)을 하는 모습.
포항 광남서원 입구 복양문.
포항 광남서원 전경. 입구부터 언덕으로 점차 높아지는 구조다.
황보인의 손자인 황보단으로 부터 단의 아들 서, 손자 강 까지 3대의 묘가 실전돼 1936년 추원단을 설단해 후손들이 매년 10월 추모 봉향을 하고 있다. 오랜 세월 동안 기존 비와 비각이 어지러져 1992년 포항시 보조금으로 비와 비각을 새로 건립했다.
영천 황보 씨의 은인인 충비 단량지비.


포항 광남서원 충의당.
포항 광남서원 숭의당 내부 모습.
포항 광남서원에 자리한 영의정 충정공 지봉 황보 선생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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