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심청전’은 효(孝)를 강조하는 문학 작품입니다. 가난하고 눈먼 아버지를 둔 심청이라는 한 어린 소녀가 자신의 몸을 팔아서 지극한 효를 실천하는 이야기입니다. 죽음을 불사하는 심청의 효성에 감읍한 용왕님이 그녀를 다시 살려 황후가 되게 한다는 내용입니다. 덤으로 아버지의 눈도 뜨게 합니다(죽은 딸이 황후가 되어 나타나자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눈을 뜨게 됩니다). 현실적으로는 전혀 실현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민중의 한(恨)이 그렇게 문학적으로 형상화된 것이겠습니다. 그러나, 효를 선창(宣暢)하는 이야기이지만 우리가 「심청전」에서 볼 수 있는 효는 그저 미미할 뿐입니다. 있다 해도 그저 허황된 것일 뿐입니다. 다시 살아서 황후가 되고 아버지의 눈까지 뜨게 만든다는 것은 누가 들어도 명백한 거짓말입니다. 그러니 그런 효도의 내용을 상세히 묘사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심청전’에서 가장 절절한 것은 ‘가난과 불효’입니다. 그것이 주는 슬픔입니다. 슬픔과 죄책감에 대한 동병상련입니다. 그래서 예부터 “심청가를 듣고 울지 않는 자는 인간이 아니다(심청가로 청중을 울리지 못하는 자는 소리꾼도 아니다)”라는 말이 전해져 내려오는 것입니다.

‘심청전’과 같은 고전 문학작품을 아이들에게 가르칠 때는 세심한 주의가 요구됩니다. 가능하면 안 가르치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죽음’이라는 주제는 본디 성인들에게 유효한 것입니다. 이제 태어나서 몇 년 제정신으로 살아보지도 못한 아이들에게 문학 속의 죽음을 이해시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심청이가 효도를 위해서 자기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는 것을 아이들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저 과장되고 억지스러운 어른들의 강요일 뿐이라고 생각할 공산이 큽니다. 실제로 예전의 초등학교 국어교과서에서 그런 심청이의 효 행동을 자신의 입장에서 한번 평가해 보라고 주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나는 끝까지 살아서(돈을 벌어서) 부모님께 효도하지 결코 심청이처럼 죽지는 않겠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당시 교과서를 편찬했던 이들의 작은 실수에서 비롯된 해프닝이겠습니다만 한편으로 우리 사회가 문학작품을 어떻게 대접하는지를 잘 보여준 사례라 하겠습니다.

심청이가 선택한 ‘죽음’은 한 개인의 행동이라기보다는 사회적 차원의 해방적 실천이었습니다. 그녀를 대제사장, 큰 무당으로 보는 것도 그런 관점에서입니다. 스스로 희생제물을 자처하여 공동체의 부활을 견인하는 신화적 영웅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신화적, 문화인류학적인 관점만 가지고 ‘심청전’을 이해해서는 안 되는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것이 문학인 것은 ‘상세한 묘사’가 있기 때문이므로 ‘가난과 불효(죄책감)’에 대한 피할 수 없는 동병상련을 부르는 작품의 디테일도 높이 평가되어야 할 부분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죽음’ 그 자체에 대한 속 깊은 통찰입니다. 서양에는 ‘햄릿’의 죽음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심청전’의 죽음이 있습니다. “살아 부지할 것인가, 죽어 없어질 것인가, 그것이 문제다(To be, or not to be : that is the question)”라는 햄릿의 고뇌와 심청이의 “아이고 아버지~, 이제는 하릴없이 죽사오니, 아버지는 어서 눈을 떠, 대명천지 다시 보고, 칠십생남(七十生男) 하옵소서”라는 축원이 그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누가 뭐래도, 죽음만이 해결책이었습니다. 감당하기 힘든 현실에 대면한 자에게 엄습해 오는 거역하기 힘든 죽음의 유혹을 그들은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한 몸 없어지기를 소망하는 것이나 아버지의 행복을 위한 희생을 자처하거나 모두 타나토스(죽음 충동)이기는 한 가지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모순과 억압에 오직 죽음만으로 대항할 수밖에 없었던, 유한자(有限者) 인간의 외마디 절규일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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