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2월 12일 국내 사법 사상 처음으로 대구지법에서 열린 국민참여재판에서 배심원들이 선서를 하고 있다. 경북일보 DB.

2008년 2월 12일 대구지법에서 시작된 대한민국 최초의 국민참여재판. 일반 국민 중에 뽑힌 배심원들이 피고인에 대한 유·무죄 여부와 양형에 직접 의견을 내는 등 새로운 재판문화가 시작됐다. 사법부의 상징인 재판의 권한을 국민과 함께 나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사상 첫 국민참여재판을 소재로 한 영화 ‘배심원들’이 15일 개봉을 앞두고 관심을 끈다. ‘처음이라 더 잘하고 싶었던 보통 사람들의 가장 특별한 재판’을 주제로 한 이 영화는 직업도 생각도 각양각색인 8명의 배심원이 주인공이다. 재판부와 배심원단의 갈등 속에서 보통 사람들이 상식에 기초해 사건의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을 경쾌하게 그려내 공감대와 여운을 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영화 속 이야기와 실제 대구지법에서 이뤄진 대한민국 최초 국민참여재판을 비교해가며 당시를 되짚어봤다.

△살인 vs 강도상해

영화 ‘배심원들’에서는 서울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다룬다. 부모를 살해한 자식이 피고인이다. 범죄 증거, 증언, 피고인의 자백 모두가 확실해 양형 결정만 남았던 살해 사건을 맡게 된 배심원들이 피고인의 갑작스러운 혐의 부인으로 유무죄를 다투게 되면서 예상치 못한 전개를 맞는다. 제작진은 국민 사법 참여제도의 틀을 만든 김상준 전 서울고법 부장판사에게 자문하고, 로스쿨 강의를 청강과 더불어 현직 판사 취재를 거쳤다고 했다. 반짝반짝 영화사 신보영 홍보실장은 “대구지법에서 시작된 사상 최초의 국민참여재판을 모티브로 했지만, 영화 속 사건은 서울에서 벌어진 사건에 다양한 요소를 넣었다”고 설명했다.

대구지법에서 이뤄진 사상 최초의 국민참여재판은 강도상해 사건이다. 퀵서비스 배달일을 하다가 낸 교통사고 합의금을 마련하기 위해 사채를 썼다가 빚 독촉에 시달린 당시 27살의 남성이 2007년 12월 26일 월세방을 구하는 것처럼 가장해 남의 집에 들어가 미리 준비한 흉기로 당시 70살의 집주인 할머니를 위협하고 때린 뒤 돈을 빼앗으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다.

당시 9명의 배심원은 피고인이 범행현장에서 강도를 할 의사를 포기했다가 여동생에게 행패를 부리겠다는 사채업자의 협박전화를 받고 우발적으로 범행한 것으로 인정해 ‘유죄’ 의견을 냈다. 9명 중 5명은 징역 2년 6월에 집행유예 4년, 1명은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 3명은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의 양형 의견을 냈다. 대구지법 제11형사부는 피고인에게 징역 2년 6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하고, 보호관찰과 80시간의 사회봉사를 명했다. 배심원 9명 중에 가장 많은 인원이 낸 양형 의견과 재판부의 판단의 일치한 것이다. 재판부는 범행 직후 피해자에게 응급조치를 한 후 병원으로 데려간 데다 목격자에게 신고 요청을 했고, 우발적으로 범행에 이른 점, 피해자가 피고인의 처벌을 원하지 않은 점 등을 참작했다.
 

대한민국 사상 최초의 국민참여재판을 소재로 15일 개봉하는 영화 ‘배심원들’의 한 장면. 반짝반짝영화사.

△배심원 8명 vs 9명

영화에는 8명의 배심원이 등장한다. 재판 당일 불출석한 배심원의 공석을 채우기 위해 급하게 8번 배심원으로 선정된 청년 창업가에서부터 늦깎이 법대생, 요양보호사, 무명배우, 대기업 비서실장, 무직자와 취준생 등 다양한 캐릭터가 나온다.

대구지법에서 이뤄진 국민참여재판에서는 86명의 후보 가운데 3명의 예비배심원을 포함한 12명이 배심원으로 뽑혔고, 9시간 동안 진행된 재판을 거쳤다. 공교롭게 남녀 성비가 6명씩 같았고, 30대 8명, 40대 3명, 20대 1명이었다. 직업별로는 주부가 4명으로 가장 많았고, 회사원 3명, 자영업자 2명, 일용직·건축업·공기업 직원 각 1명이었다. 대졸 8명에 전문대졸 3명, 고졸 1명이었다. 국선전담변호사로서 배심재판을 다룬 미국 영화 10편 넘게 보고 피고인을 변론했다는 전정호 변호사는 “변론에 몰입해 설득력 있는 표현을 쓰려다 보니 진한 사투리를 썼고, 배심원들의 동정심에 호소했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그러면서 “집행유예형을 받아 풀려난 피고인과는 이후 연락을 주고받지는 않았다”고 덧붙였다.

참고로 당시 법정에는 2009년 5월부터 배심원제를 도입하는 일본의 법무성 소속 검사 구마다 아키히테 검사가 공식 참관했고, 뉴욕타임스, 아사히신문, NHK, TBS(동경방송) 등 외신을 포함한 언론사 소속 100여 명의 취재진이 몰리기도 했다.

△역대 최장 국민참여재판도 대구지법서

2008년 2월 12일 이후 대구지법에서는 190건의 국민참여재판이 진행됐다. 2017년 5월~올해 4월 기준 배심원 후보자 실질 출석률이 30.8%로 높지 않았다. 생업을 하지 못해 경제적 안정을 현저하게 위협하는 경우 등 정당한 사유로 인정한 사례 외에 출석하지 않은 배심원 후보자에 대해 실제로 과태료를 부과한 사례는 없었다. 배심원이 유·무죄 평결과 재판부의 유·무죄 주문 일치율은 97.5%에 달했다. 40건 가운데 1건만 일치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최장기간 진행한 국민참여재판도 대구지법이 맡았다. 2015년 12월 7일부터 5일간 진행한 ‘상주 농약 사이다’ 사건이다. 대구지법에서 진행한 190건의 국민참여재판 중에 4일 만에 종결한 사건은 1건, 3일 1건, 2일 18건이다. 전체의 88.9%인 169건은 하루 만에 끝낸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제11형사부장으로서 5일간의 국민참여재판을 이끈 손봉기 대구지법원장은 “저마다 직장이 있는 배심원들이 5일간 매일 밤늦게까지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며 “그런데도 배심원들이 심리과정에 적극적으로 집중해줘서 고마운 마음이 아직도 남아있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일반 시민의 눈으로 상식선에서 사건을 들여다본 배심원들의 양형과 법률전문가인 재판부의 의견이 거의 일치해서 놀라고 감동하기도 했다”며 “집단지성의 희망을 봤다”고 강조했다.

배준수 기자
배준수 기자 baepro@kyongbuk.com

법조, 건설 및 부동산, 의료, 유통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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