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동학 혜명학술원 원장
류동학 혜명학술원 원장

후한 명제(재위 57년~ 75년)시기 인도에서 온 가섭마등과 축법란 이후 중국불교에서 가장 먼저 소승불교 경전을 번역한 승려는 후한(後漢)의 환제(桓帝·146-167) 초인 147년에 뤄양에 온 안세고이다. 이후 160년경 지루가참이 대승수행법을 전하면서 천태 지의(智?·538년 ~ 597년)의 지관법(止觀法)을 거쳐 선불교로 연결된다.

한편 중국 최초의 구법승은 260년에 서역의 호탄(현 허톈(和田))행을 감행한 주사행(朱士行·203~282)이다. 그는 지루가참의 번역이 잘못되었음을 알고‘반야경’연구를 위하여 호탄으로 가서 그곳에서 산스크리트본(本) 90장(章)을 얻어 제자인 불여단에게 중국으로 가져가게 하고, 그는 그곳에서 80세에 입적했다. 본격적인 인도 구법승은 동진(317~420)의 법현이다. 그는 15년간 무려 30여 국을 다니다가 귀국했는데, 그의 여행기가 유명한‘고승법현전’이다.

중국불교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기는 혼란기였던 위진남북조시대(220~589)였다. 특히 5호 16국 시대(304~439)의 갈족이 세운 후조(319∼351)의 석륵과 석호를 감화시킨 구자국 출신의 불도징(232년 ~ 348년)과 제자인 도안(312~385)의 활약은 대단했다. 도안은 승려들의 성씨를 석씨(釋氏)로 바꾸자고 주장한 인물로 한국의 나반존자신앙의 연관이 되는 빈두루존자신앙의 최초 유포자이기도 하다. 도안의 제자로는 정토신앙의 창시자이자 최초의 염불수행의 결사인 백련사를 단행한 동진의 혜원(334~416)이 유명하다. 그는 강서성 구강시 여산(廬山)의 호계 동림사에서 나가지 않고 37년간 포교했다.

쿠마라지바 또는 구마라집(344~413)은 서역의 구자국 출신으로 고구려에 불교를 전한 전진의 부견(재위 357∼385)이 흠모하여 여광으로 하여금 현재의 신장 위구르자치구의 아커쑤 지구의 구자국(쿠처)을 멸망시키고 데려온 인물이다. 이후 여광이 세운 후량(386~403)은 구마라집을 모셔오고자 한 후진(384~417)의 요흥에 의해서 멸망하고 401년 구마라집은 결국 장안에 오게 된다.

그는 35부 348권이나 되는 경전을 번역하게 되는데, 이것을 현장의 신역과 대비하여‘구역(舊譯)’이라 한다. 이와 같이 구마라집은 천재적인 인물로 불교의 중국화에 크게 기여한 승려였다. 중국 섬서성 서안 종남산 초당사에 구마라집의 사리탑과 보호각이 있다. 한편 쿠차의 키질석굴 입구에는 쿠마라지바의 동상이 서 있다.

보리달마가 중국에 온 시점은 남조(송-제-양-진)의 양나라 무제 때 였다. 양무제 소연은 소도성이 세운 제(479~502)를 무너뜨리고 양((梁·502~557)을 세운 개국황제로 무제의 치세는 48년이란 긴 기간의 안정기였으나 무제의 치세 후반에는 불교에 너무 심취하여 스스로 동태사에 4번이나 출가하고 막대한 국가 재물을 절에 바치는 어리석은 짓을 했다.

520년 달마는 인도에서 양나라로 왔다. 그때 무제가 묻고 달마가 대답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절대적인 진리의 궁극은 어떠한 것입니까. 텅 비어서 성스러움도 없습니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알지 못합니다” 이 대화에서 달마는 무제가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양자강을 건너 북위로 갔다. 또 달마는 무제가 자신이 절을 짓고 경전을 사경하고 스님을 제도한 공적을 들며 공덕이 어느 정도 되느냐는 물음에, “고작해야 좋은 곳에 태어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라고 한 이야기도 전한다. 결국 양무제는 달마의 지혜를 알아 보지 못하고 후경의 난을 초래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고, 만나고서도 만나지 못했구나. 예나 지금이나 후회하고 또 한이 될 뿐이로다”라는 비문을 양무제가 남겼다 한다. 6세기 달마 이후 한국불교의 주류인 중국 선종(禪宗)이 본격화된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