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 홍관이 진봉사(進奉使)를 따라 송나라에 갔다. 홍관이 변경에 머물고 있었는데 송의 관리 양구와 이혁이 황제 휘종의 명을 받고 숙소로 찾아왔다. 이들은 대뜸 홍관에게 글씨와 그림 족자를 달라고 했다. 홍관이 김생이 쓴 행초(行草) 한 권을 보여주자 두 사람은 눈이 휘둥그레지게 놀랐다. 이들은 ‘오늘 왕우군(王右軍·왕희지가 우군장군의 벼슬을 했다고 해서 붙여진 별칭), 왕희지가 쓴 글씨를 보게 될 줄은 미쳐 몰랐다’라고 했다. 두 사람이 웃으면서 ‘천하에 왕우군을 빼놓고 어찌 이런 신묘한 글씨가 있겠소’라며 김생 글씨라 여러 번 말해도 믿지 않았다.” ‘삼국사기’ 열전에 나오는 김생의 글씨가 중국의 서성(書聖) 왕희지의 글씨로 오인될 만큼 글씨의 품격이 높았다는 일화다.

김생은 771년(성덕왕 10년)에 태어나 80세 넘게 서예에 몰두한 통일신라시대 사람이다. 그는 예서와 행초서에 독보적 경지를 이뤘다. 서예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는 김생이 ‘해동명필’로 명성을 떨친 것은 뛰어난 자질과 줄기찬 노력 때문이기도 했지만 당시 신라문화의 위상과도 관련이 있다고 한다. 8세기 신라의 위대한 시대문화가 김생을 ‘동방의 서성(書聖)’으로 자리매김하게 했다는 것이다.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는 문예부흥기를 맞았다. 위대한 석굴암 석불조각과 성덕대왕신종이 만들어졌고, 절정의 황금 금속공예 등이 이 시대에 꽃을 피웠다. 이 같은 시대적 배경 속에 김생이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은 당시 유행하던 중국풍의 글씨를 답습하는데 그치지 않고 활달한 운필과 변화무쌍한 짜임으로 독창적 경지를 이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대단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전해지는 김생 글씨는 많지 않다. ‘태자사 낭공대사 탑비’, ‘전유암산가서’ 등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런데 최근 김천의 수도암에 있는 도선국사비의 비문이 김생의 글씨라는 것이 밝혀졌다. 김생이 808년에 쓴 것으로‘원화삼년(元和三年)’,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김생서(金生書)’ 등 21자가 추가 판독됐다고 한다. 경북 봉화 태자사에 세워졌던 낭공대사탑비의 필체와 매우 비슷하다고 한다. 희귀한 김생의 글씨 발견 소식이 반갑다.
 

이동욱 논설실장 겸 제작총괄국장
이동욱 논설주간 donlee@kyongbu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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