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풍수(風水)와 글쓰기는 공통점이 많습니다. 땅의 모습을 살펴서 좋은 명당자리를 찾아내는 일과 생활 속에서 좋은 글감을 찾아내는 일이 많이 비슷합니다. 전문가가 아닌 저 같은 사람이 지리(地理)나 지세(地勢)의 속사정을 알 까닭이 없습니다만, 간혹 “이곳은 참 편안한 느낌을 준다.”, “이곳의 풍경이 참으로 오묘하다.”와 같은 소감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곳의 지세와 그날의 내 기분이 혼연일체가 되어서 일종의 감응(感應)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같은 장소라도 그때그때 느낌이 달라지기도 해서 처음 찾았을 때와 훗날 다시 찾았을 때의 느낌이 많이 다를 때도 왕왕 있습니다. 좋았던 것이 심드렁해질 때도 있고 밋밋하던 것이 돌출할 때도 있습니다. 자연과 인간의 감응 여부가 그때그때의 소감을 좌우합니다. 글쓰기도 마찬가집니다. 글 쓰는 사람의 의식(意識)이 부지런히 안팎을 드나들며 세상과의 감응을 추구하지 않고서는 신선한 글감을 고를 수도, 경탄할 만한 주제를 포착할 수도 없는 법입니다. 대상과 주체가 혼연일체가 되는 경지를 자주 갖게 될 때 좋은 글쓰기가 이루어질 공산이 커집니다. 김동리 소설 「무녀도(巫女圖)」의 초입 부분이 그런 대상과 주체의 혼연일치를 잘 보여줍니다. 작가는 모화의 집터 묘사로 그곳에 사는 한 인간의 존재 양태를 일목요연하게 설명합니다.

이 마을 한구석에 모화(毛火)라는 무당이 살고 있었다. 모화서 들어온 사람이라 하여 모화라 부르는 것이었다. 그것은 한 머리 찌그러져 가는 묵은 기와집으로, 지붕 위에는 기와버섯이 퍼렇게 뻗어 올라 역한 흙냄새를 풍기고 집 주위는 앙상한 돌담이 군데군데 헐리인 채 옛 성처럼 꼬불꼬불 에워싸고 있었다. 이 돌담이 에워싼 안의 공지같이 넓은 마당에는 수채가 막힌 채, 빗물이 고이는 대로 일 년 내 시퍼런 물이끼가 뒤덮여 늘쟁이, 명아주, 강아지풀 그리고 이름도 모를 여러 가지 잡풀들이 사람의 키도 묻힐 만큼 거멓게 엉키어 있었다. 그 아래로 뱀같이 길게 늘어진 지렁이와 두꺼비 같이 늙은 개구리들이 구물거리고 움칠거리며, 항시 밤이 들기만 기다릴 뿐으로, 이미 수십 년 혹은 수백 년 전에 벌써 사람의 자취와는 인연이 끊어진 도깨비굴 같기만 했다.‘김동리, ‘무녀도’’

무당이 사는 집이 모두 모화네 같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작가는 모화 이야기가 한국인의 집단 무의식 혹은 전래적 문화가 근대적 의식 혹은 외래적 문화와 갈등하는 하나의 전형(典型)으로 받아들여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만큼 그의 시대는 위기의 시대였습니다. 새로운 것과 오래된 것이 선과 악으로 대치되는 당대의 전도된 현실을 ‘무녀도’만큼 여실하게 그려내고 있는 소설도 드뭅니다. 그러니까, 모화네 집터 묘사는 그 집 주인의 ‘심리학적 공간 표상’의 의미만을 지니는 게 아닙니다. 우리 민족 전체의 자의식이 그런 ‘도깨비굴’에 살고 있다는 암시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작가는 그런 ‘시대적 소감’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무당 모화의 삶을 자세하게 묘사하는 것이 바로 그런 작가의식의 소산이었습니다.

요즘 한 종편 TV의 돌출적인 프로그램 덕분에 ‘오래된 것의 즐거운 귀환’을 목도하고 있는 중입니다. ‘미스 트롯 진(眞)’ 선발대회가 몰고 온 여파가 여간 심각(?)하지가 않습니다. 동화가 아닌 현실에서, 살아 숨 쉬는 신데렐라가 탄생하는 과정을 전 국민이 생생하게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것이 정말 좋은 것임을 또 한번 모두가 실감하고 있습니다. 도깨비굴 같았던 모화의 집터 이야기는 이제 정말 옛날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진도 씻김굿을 비롯한 오래된 것들의 명랑한 귀환이 생활에 지친 우리 마음의 묶은 때를 시원하게 씻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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