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음은 도량이 넓었으나 불의와 타협할 줄 몰랐으니 결국 이 때문에 죄를 얻었고, 또 그 때문에 만백성의 추앙을 받게 됐다. 흐르는 눈물을 닦아가며 그의 행적을 기록하려니 슬픔을 가눌 수 없어 글귀가 떠오르지 않는구나. 그의 덕으로 나의 속됨을 덮고, 그의 말을 훔쳐 내 흠을 숨기면서 이 글을 써서 친구의 무덤에 묻노라” 한음 이덕형과 절친 이었던 오성 이항복이 한음의 죽음을 애도하는 추도의 글이다.

‘오성과 한음’이라는 호는 조선시대를 풍미한 명콤비의 대명사다. 이덕형은 이항복과 함께 임진왜란의 국란을 맞아 같이 머리를 맞대고 나라를 구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인 재상들이다. 특히 외교술이 뛰어난 이덕형은 일본과 명나라를 오가며 시의적절한 외교를 펼쳐 국란 극복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이덕형은 장인 이산해가 영수인 강경파 북인이 아닌 온건파 남인에 소속돼 정치활동을 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대사헌이었던 이덕형도 영의정 이산해, 좌의정 류성룡, 도승지 이항복과 함께 선조의 어가를 호송, 평양으로 피난시켰다. 파죽지세로 대동강까지 밀고 올라 온 왜군은 이덕형에게 강화회담을 요청했다. 조정 대신들이 위험하다고 말렸지만 홀로 배를 타고 나가 왜군 사신 겐소(玄蘇)와 담판을 벌였다.

겐소가 “요동으로 가는 길을 열어달라”고 요청하자 이덕형은 “죽어도 요구를 덜어줄 수 없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이 일을 두고 선조가 칭찬했다. “이덕형은 왜적이 창궐하던 때 조각배를 타고 적과 만났으니 몸을 잊고 나라를 위한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청원사(請援使)로 임명돼 지원병을 요청하기 위해 명나라에 간 이덕형의 충심 어린 호소에 설득당한 명나라는 원군을 파견키로 했다. 원병을 요청하는 외교문서에 “명나라가 빨리 원병을 보내지 않으면 조선군 모두 왜군이 돼 명나라로 가게 될 것이다”라고 명시했다. 명나라 원군이 즉시 압록강을 건너온 것은 대국에 대한 협박이나 다름없는 이덕형의 대담함이 주효했기 때문이다.

한국에 대해 노골적으로 ‘홀대 외교’를 펴고 있는 중국을 길들이려면 이덕형 같은 외교 고수가 절실하다. 외교 문외한의 주중 대사로는 난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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