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구 물리치고 백성 지킨 우국충정 드높은 기개 느껴지는 듯

김영렬의 자는 열지(烈之), 호는 맹암(孟巖), 시호는 양소(襄昭), 본관은 의성이다. 그는 신라 경순왕의 제5자 김석(金錫)의 9세손인 김용비(金龍庇)의 손자다.

1400년(정종 2년)에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로 있을 때 제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고 태종을 왕위에 오르게 한 공으로, 1401년(태종 1년) 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 3등에 책록됐다. 1404년 참판승추부사(參判承樞府事)로 있을 때 왜선 1척을 노획하고 왜병을 포로로 잡은 공으로 태종대왕으로부터 표리(表裏·겉과 속의 옷감)를 하사받았다.
이후 은퇴해 장단(長湍)의 맹동(孟洞)에 은거하다 죽었다. 의성군(義城君)으로 봉작되었고, 박포(朴苞)의 난 때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왕을 호위한 공으로 사후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전라도 장성(長城)의 학림서원(鶴林書院)에 배향되었는데 1868년(고종 5년) 대원군에 의해 철폐됐다.
한편 김영렬을 제향하는 신천서원(新川書院)은 왕신평야가 내려다보이는 대나무 숲과 솔숲에 쌓여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 건물은 맹암(孟巖) 김영렬을 추모하기 위해 1945년에 건립하였고, 1985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39호로 지정됐다.






김영렬이 좌명공신 3등에 책봉될 때에는 교서와 공신도감에서 발급한 녹권이 있었으나, 현재 공신교서만 남아 있는 형편이다. 공신교서는 박포의 반란 시에 유공한 사적을 간단히 기록한 후 양전 89결 노비 8구 등을 하사한다고 되어 있다.
회맹록은 개국, 정사, 좌명공신 66명이 회맹한 후 하늘에 맹세를 한 후 작성하였던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좌명공신 1등에 책봉된 하륜(河崙·1347∼1416)의 후손들이 소장했던 회맹록의 원본은 현재 없어졌으나 호정집(浩亭集)에 수록되어 있어서 비교해 볼 수 있다. 양식상으로는 동일하지만 약간씩 차이가 드러나며 당시 회맹록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국가에서 발급한 공문서로서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후대에 배접하여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자료로서의 희귀성으로 인해 고문서학적으로 매우 중요하며 당시의 사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료가 된다.
현재 김영렬 좌명공신의 23대손인 김영일(73세) 씨가 지난해부터 서원을 관리하고 있다. 매년 3월 초 정쯤에 지역의 유림관계자들과 군수 기관장을 모시고 제사를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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