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소설은 고래사냥 아니면 고양이 키우기다” 그런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소설가들은 둘 중의 하나를 글로 씁니다. ‘겁나 커서’, 한 마리 잡으면 온 마을 사람들이 다 배불리 먹을 수 있는 큰 동물 잡는 이야기거나 아니면 ‘가까이 하기엔 너무 기르기 힘든’ 작은 동물 키우는 이야기거나, 둘 중의 하나를 그들은 씁니다. 이야깃거리가 무궁무진한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소설이라는 게 결국은 그 둘 중의 하나입니다. 상식과 윤리의 허를 찌르는 재미지고 숙연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삶의 목표나 인간 실존의 한계를 두루, 혹은 요모조모 꼼꼼히, 점검하는 게 주로 소설가들이 하는 일입니다. 오래전부터 그래 왔기 때문에 우리는 소설을 대할 때(요즘은 영화나 드라마를 많이 봅니다만) 그 기준에서 작품성 유무를 판단할 때가 많습니다. 최근에 큰 상을 받은 <기생충>이라는 영화를 두고도 ‘고래사냥’이냐 ‘고양이 키우기’냐를 두고 약간의 설왕설래가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보는 이의 관점이나 취향에 따라서 호불호가 확연하게 갈리는 것 같았습니다.

고래와 고양이는 상징 동물입니다. 그만한 상징 동물도 흔치 않습니다. 인간과 오랫동안 가까이 있어 왔지만 끝내 인간에게 동화되거나 복속되지 않은, 그래서 인간의 거울이 되고 집착의 대상이 되는, 귀한 동물들입니다. 그래서 대놓고 고래 잡는 이야기나 고양이 키우는 이야기를 소설로 쓰는 작가들도 종종 나옵니다. 멜빌의 『백경』이나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는 전자에,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나 제가 쓴 『고양이 키우기』는 후자에 속합니다. 멜빌의 『백경』은 괴물 흰고래를 잡으러 떠나는 불굴의 인간 정신을 묘사하고 있고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는 청새치(고래 대용)와 사투를 벌이는 한 늙은 어부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모두 스스로 목표를 정하고 승리하는 인간의 삶을 그려내는 소설들입니다. 고양이 소설은 일반적으로 작가의 자기 풍자이거나 고양이 눈을 통해 인간 세태를 묘사하는 것일 때가 많습니다. 이때 고양이는 거울 역할을 맡거나 세필(細筆) 역할을 맡습니다. 인간을 비추어주는 거울이 되거나 인간의 언어로는 포착하기 힘든 상황을 보다 용이하게 그려내는 데 사용됩니다.

… 집에서 난 고양이 새끼 한 마리를 소설가 이브 나바르에게 갖다 주었더니 그놈에게 ‘티포주’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내 소설 『마왕』의 주인공 이름이다. 6개월 뒤 그 집에 갔다 와서 나는 그에게 이런 편지를 써서 보냈다. “티포주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네. 정말이지 내가 자네에게 갖다 주었을 때는 그저 평범할 뿐이었던 그 고양이가 자네의 열성적인 배려 덕분에 보기 드문 짐승, 요컨대 예외적인 사내가 되었네 그려. 그 녀석에게는 내가 동물에게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활기, 젊음, 광채, 자신감이 넘치고 있어. 그 녀석이 때로 감당 못하게 군다 해도 그것은 바로 어떤 공허감을 메우기 위하여 자네가 그 녀석에게 기대하는 바에 꼭 맞는 만큼만 그러는 것일세.” 그런 말을 적어 보내자니 우리 집 정원에서 괴물처럼 엄청난 덩치로 자라버린 코카서스 산 어수리나무를 보고 어떤 여자 친구가 한 말이 생각난다. “당신이 그렇게 사랑하니까 그렇죠. 이 나무가 그걸 아는 거예요.” 나중에 이브 나바르는 나에게 이런 말을 하게 된다. “자네는 내게 티포주를 줌으로써 큰 도움을 주었네. 그러나 자네는 나한테 공쿠르 상을 줌으로써 나를 속속들이 망쳐놓았네.” <미셸 투르니에, 『외면일기』>

요즘 사시는 게 많이 팍팍하시죠? 고래든 고양이든, 소설(영화, 드라마 포함)판에서든 정치판에서든, ‘어떤 공허감을 메워 주는’ 시원하고 근사한 이야기 한 편 나와 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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