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裡里)에서 오산(五山)까지 3.4 킬로미터
나도 걸을 만한 거리였다.
자갈 많은 신작로엔 미루나무들이 그림붓처럼 서있었다.

밤에도 걸을 수 있는
이리에서 오산까지 철길이 좋았다.
콜타르 칠한 침목은 또박또박 내 걸음에 응답해 주고
6학년의 밤길에 레일은 내 동무였다.

눈보라가 얼굴을 때리고 때리며
조개탄 같은 자갈들이 침목과 침목 사이에서 비죽거릴 때
문득 뒤돌아본 내 눈앞에
시커먼 미카!
눈보라 속을 집어삼킬 듯 달려들었다.

그때 나는 열두 살,
지금의 나는
예순 해도 전 그 겨울밤 철길을 걷는 유령인지 모른다.





<감상> 과거의 기억은 유령처럼 사라지지 않고 나를 이끌고 왔다. 물론 좋은 기억이라면 더욱 괜찮을 것이다. 지난한 삶이지만 소년은 그걸 느끼지 못하고 그림붓으로 하늘을 향해 자신의 꿈을 적어보았을 것이다. 내 말과 걸음에 응답해 주는 침목, 어두운 길을 밝혀주는 레일은 든든한 동무였다. 커가면서 세상은 만만치 않게 눈보라가 덮치고, 비죽거리는 자갈처럼 방황하는 날도 있었다. 문득 달려드는 증기기관차 미카처럼 늙음이 내 눈앞에 와 있다. 꿈 많던 소년이 나를 데리고 여기까지 왔다. 육체는 주름져 있으나 영혼은 소년처럼 늙지 않았으니 아직 청춘이다. <시인 손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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