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도 국찬한 '조선 의사' 이사룡의 살신성인 어찌 잊으리오

옥천서원 전경

△‘250년 후손들의 세거지에 자리 잡다’

성주군 용암면 대봉리 봉산마을은 25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성산이씨 세거지이다. 그리고 마을 뒤편 산자락 경사지에는 한 서원이 자리 잡고 있으니, 이 서원은 마을 주민들에 있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과 같은 존재이다.

서원의 명칭은 ‘옥천서원(玉川書院)’으로 마을 주민들의 선조인 조선중기 인물 이사룡(1595~1641)을 배향하고 있는 문중서원이다. 서원 명칭의 ‘옥천’은 이사룡이 평소 살던 곳에서 유래하였다.

옥천서원 현판.

산록 경사지에 남향하여 위치한 서원은 그 부지를 4단으로 조성하여, 높게 쌓은 축대위의 외삼문을 들어서면 앞쪽으로 강당인 충의재(忠義齋)와 동재‘남덕재(覽德齋)’·서재‘양현재(養賢齋)’가 자리하고 있고, 뒤쪽에는 내삼문 안에 사당인 충렬사를 배치하여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법을 취하고 있다. 건물의 규모는 강당인 충의재는 정면 5칸, 측면 1칸 반, 충렬사는 정면 3칸으로 되어 있으며, 동·서재는 각각 3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강당 우측에는 서원이 훼철되었다가 중건되기 이전 사당의 역할을 대신하였던 가묘(家廟)의 일곽이 자리하고 있다.

옥천서원강당(충의재)전경

옥천서원은 건축적인 측면에서 사당과 가묘가 일곽 내에 공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원의 변화된 양상을 살필 수 있는 문화재로서 가치가 높으며, 2009년 7월 6일 경상북도 기념물 제162호로 지정되어 보존·관리되고 있다.

서원 기문(記文)에 따르면 옥천서원은 1692년(숙종 18년)에 이사룡이 태어나 살았던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작촌에 성주목사 오도일(吳道一)의 후원과 관내 사민(士民)들의 공론에 의해 건립된 충렬사(忠烈祠)에서 유래한다.

옥천서원사당(충렬사)전경

건립 이후 충렬사는 1796년(정조 20년)에 ‘충렬사’ 편액과 정려 및 정조대왕이 직접 지은 제문의 하사가 있게 되면서 사액되었으며, 외삼문과 문루, 동·서재, 강당 등의 시설을 갖추면서 서원으로 발전하여 옥천충렬사(玉川忠烈祠) 또는 옥천서원(玉川書院)으로 불려 지게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872년(고종 8)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으며 1919년 그의 직계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세거하고 있는 현 위치에 중건되었다.

한편 옥천서원이 훼철되기 전 입지했던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작촌마을의 옛 서원 터에는 1958년 이사룡의 후손들이 서원 터임을 기념하여 세운 옥천서당이 자리 잡고 있다. 서당은 월항면 인촌리 작촌마을 삼거리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면 4칸, 측면 1칸반 규모의 강당 1동으로 되어 있다. 또한 서당 앞쪽에는 기다란 자연석을 이용한 그의 옛 유허비와 근래 후손들이 석재를 다듬어 세운 유허비가 함께 세워져 있다.



△조선의사 이사룡으로 불리다.

이사룡의 자는 사중(仕中), 호는 괴정(槐亭)이며 본관은 성산으로 우리나라에 엄청난 피해를 입힌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5년(선조 29) 성주 망성방 작촌리(현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무과에 급제하여 무반직을 역임했으며 아버지 이정건(李廷建) 또한 무과에 급제하여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을 지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사룡은 자라면서 체격이 건장하고 담략이 뛰어나 장차 무장으로의 출세가 기대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의 여파가 성주지역에도 미치고 특히 아버지가 난중에 사망하면서 가세가 크게 기울어 무과 급제에 대한 꿈을 접고 어영청의 군사가 되었다. 당시 어영청 군사들은 급료를 지급받는 일종의 직업 군인이었으므로 가세가 기운 가난한 유생이나 무반의 후예인 한량들도 생계를 잇기 위하여 군사로 자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사룡도 생계를 도모하기 위하여 어영청의 군사로 자원했던 것이다.

화포와 조총을 다루는 솜씨가 걸출했던 이사룡은 1637년(인조 15년)에 하급 무관직인 사맹(정 8품)을 제수받았고 얼마 후 소대장격인 기총(정 8품)으로 전임되었다.

병자호란으로 조선을 제압한 청나라가 명을 공격하기 위해 1640년(인조 18) 조선군의 동원을 요구하자 어영청 군사였던 이사룡도 여기에 징발되어 전장으로 끌려가 전투에 참전하게 되었다. 그는 전투를 위한 행군에 임하자 출정군을 위로하는 잔치를 거절하고 모친에게 나아가 영결을 고하고, 처자에게 이르기를 “내가 죽어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니 너희들이 모친을 잘 봉양해 달라”고 하는 등 의도치 않은 참전에 임하면서 이미 목숨을 던질 각오를 보이기도 하였다.

1641년(인조 20년) 4월 금주위 송산 아래에서 명군과의 전투에 참전하게 된 이사룡은 차마 명군을 향해 화포를 쏠 수가 없어 포탄을 제거한 채 공포(空砲)를 발포하는 것으로 그 의사를 표시하였다. 청군들이 이를 알고 공포를 쏜 것을 추궁하자 이사룡은 “명나라 조정은 우리나라에 있어서 군신의 의리가 있고 부자의 은혜가 있다. 만약 우리가 명나라 사람에게 발포한다면 이것은 자식이 아비를 죽이고 신하가 임금을 죽이는 것이다. 천하에 어찌 이러한 이치가 있겠는가” 라고 말하며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청군의 장수들이 그의 의기를 높이 사서 다섯 차례의 회유와 일곱 차례에 걸친 협박을 하였음에도 이사룡은 끝내 뜻을 굽히지 않고 태연히 죽음을 받아들였다.

이러한 그의 죽음을 첩보를 통해 알게 된 명의 장수 조대수(祖大壽)는 장대에다 특별히 ‘조선의사 이사룡’이라 써서 걸어 그의 의리를 널리 알렸으니 이후 이사룡은 조선의사로 널리 불리게 되었다.

명군 공격에 협조하지 않고 공포를 쏘는 행동으로 의도에 반하는 행동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사룡의 의로움에 감동한 청군들도 그를 정의롭게 여기고 시신을 본국으로 돌려보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이사룡 정려

△죽어서 조용히 의(義)를 취하다

옥천서원에 배향된 인물인 이사룡은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아무래도 그가 높은 관직을 역임하지도 않았고 널리 알려진 선비도 아닌 하급 무관으로서 조용히 의(義)를 취했던 것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죽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의리에 죽는 것이 어렵고, 의리에 죽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죽되 조용히 의리를 취하여 죽는 것이 더욱 어렵다. 옛날 송나라의 문천상(文天祥)이 장홍범(張弘範)에게 잡히던 날에 죽지 않고 시시(柴市)에서 죽은 것과 우리 조선의 삼학사(三學士)가 남한산성에서 잡히던 날에 죽지 않고 심양에서 죽은 것은 바로 이러한 도리를 쓴 것이니, 의사 이공 또한 죽되 조용히 의리를 취하여 죽은 분이로다!”

이 글은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 1837~1902)가 쓴‘이사룡신도비문’의 첫 구절에 그의 의로운 죽음을 기려서 쓴 내용이다. 이는 미천한 포수(砲手)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에 구원해 주었던 명나라를 차마 공격하지 못하고 의리를 지키려다 피살된 이사룡의 죽음을 높이 평가한 것이리라.

심지어 정조대왕은 이사룡에 대해, “우리나라 명장으로는 충무공을 맨 먼저 손꼽을 것이지만 군사 출신으로서 천하에 이름난 사람으로는 오직 이사룡이 그 사람일 것이다.(중략)순절하여 특출하게 우리나라의 빛나고 걸출한 인물이 되었는데 신분과 문벌이 한미하다고 아직껏 표창하는 은전을 내리지 못하였으니 어찌 풍교(風敎)를 세우고 이륜(彛倫)을 열어 주는 뜻이겠는가. 성주의 포수 이사룡을 특별히 성주목사로 추증하고, 지방관으로 하여금 그의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우도록 하며, 그의 후손을 우선적으로 벼슬에 등용시키고 보고하라”(‘정조실록’권38. 정조 17년 7월 27일조)고 하였으니, 이는 의(義)를 지키고자 한 이사룡의 죽음을 그만큼 높이 평가한 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정조대왕의 이사룡을 극찬한 언급이 기록된‘정조실록’외에도 여러‘실록’들에서 의를 위해 목숨을 버린 그의 공적을 치하하는 기록이 발견된다. 여기에는 그에 대한 관직의 추증과 후손을 관직에 등용할 것을 지시하는 국가의 포상이 함께 따르기도 하였다. 또한 후대인에 의해 그의 죽음을 기리며 숭상하는 선양사업이 끊이지 않았으니 신도비와 정려각의 건립,‘충절록’의 편찬은 그 결과물이라 할 것이다.

도움말=박재관 성주군 학예사
 

권오항 기자
권오항 기자 koh@kyongbuk.com

고령, 성주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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