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호는 석파(石坡)다. ‘석’자를 떼어 너의 호를 ‘석재’로 지어준다. 우리나라에서 오직 너의 재능만은 그 누구도 깨뜨릴 사람이 없을 것이란 뜻이다” 흥선대원군 석파 이하응(1820~98)이 시와 글씨, 그림, 거문고, 바둑, 장기, 언변 등에 뛰어나 ‘팔능거사(八能居士)’라 불린 석재(石齋) 서병오(1862~1935)에게 호를 지어주면서 한 말이다. 석재의 재능이 서울의 구중궁궐 운현궁에까지 들렸던 모양이다. 글씨와 그림 등 풍류에 일가견을 가진 석파가 1879년 자기보다 42살이나 아래인 18살 석재를 운현궁으로 불러 자기 호의 글자를 따 호를 지어준 것이다.

호와 관련해 다른 이야기도 있다. 석파가 석재의 서화나 글씨를 보거나 같이 바둑을 두는 실력에 감탄해 종종 “석재(惜哉)다 서동(徐童)아”라 하는 데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양반 출신이면 중용할 수 있었을 텐데 중인 출신이라 등용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이렇게 말하곤 했다는 것이다. 석파는 왕실 어인(御印)이 찍힌 왕실 소장품 소동파의 진적(眞跡) 글씨와 중국 원나라 때의 명필로 송설체로 유명한 조맹부의 그림을 주기도 했다. 석파는 ‘압록강 동쪽에서 처음 난 인재’라는 ‘압동초유지재(鴨東初有之才)’란 글을 적어 석재에게 건넸을 정도다. 대구에서 난 석재는 추사 김정희에서 석파 이하응으로 이어진 서화법의 맥을 이어 선비정신의 상징인 사군자 중심의 영남화단을 처음 열었다.

또 한 사람 호에 ‘석(石)’자가 들어가는 포항 동해면 임곡에서 출생한 석곡(石谷) 이규준(1855 ~ 1923) 선생이 있다. 석곡은 1901년 3월14일부터 열흘 간 석재의 집에서 머물며 교류했다. 석재는 나중에 석곡이 죽자 ‘석곡의 큰 도는 하늘을 근본 삼았네·先生大道本於天)’로 시작하는 애도 시를 지었다고 한다. 양기를 도와 병이 생기는 것을 막고, 병을 고친다는 ‘부양론(扶陽論)’으로 이제마와 견줄 수 있는 의학적 업적을 남긴 석곡과 석재가 서로 교류한 것이다.

최근 석곡이 재조명 되고 있고, 항일투쟁에도 참여했던 석재의 작품을 볼 수 있는 전시회가 대구문화예술회관 1층 전관에서 오는 30일부터 8월 11일까지 열린다. 석파와 석재, 석곡을 ‘삼석’이라 부를만하다.
 

이동욱 논설실장 겸 제작총괄국장
이동욱 논설주간 donlee@kyongbu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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